[한국금융 달라져야 산다] <4> 관치금융에 발목잡힌 경쟁력
○ 상품부터 인사까지 관여… ‘실적 매몰’ 부작용 불러
‘관치금융’은 한국 금융의 관행이다. ‘관치금융 척결’이란 구호는 역설적으로 관치금융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금융권의 판매 상품은 물론이고 대표이사 선임에 개입하는 일도 빈번하다.지난해 2월 함영주 당시 하나은행장의 연임이 금감원의 개입으로 무산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통합 외환·하나은행 초대 행장으로서 연임이 유력했지만 금감원은 “채용 비리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을 경우 최고경영자(CEO) 공백이 우려된다”며 제동을 걸었다. 금융당국은 비슷한 방식으로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의 3연임과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의 연임 저지를 시도한 바 있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당시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에 대한 특별감찰 무마 의혹 관련 재판 과정에서도 정치권의 금융에 대한 인식이 드러났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한 여권 인사가 “청와대가 금융권을 잡고 나가려면 유 전 부시장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이 언제든 인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은행 CEO들이 실적에 더 매달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1, 2년에 불과한 임기 중 다른 은행에 비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려다 보니 ‘과당경쟁→영업압박→불완전판매’의 악순환이 나타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터진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도 불완전한 내부 통제와 실적 압박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금감원의 ‘DLF 제재내용 공개안’에 따르면 당시 우리은행장이던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은 업계에서 펀드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기 위해 사모펀드 위주의 외형 성장 극대화 전략을 추구했다. 수시로 사업 목표와 관리실적 등 펀드 영업 추진 내용을 보고 받으며 펀드 판매에 별도의 배점을 부여했다. 관치 외풍에 시달리지 않는 성적표를 만들기 위해 ‘외형 성장’에 집착하는 동안 DLF 불씨가 커지고 있었던 셈이다.
○ 금융을 산업 아닌 수단으로 인식
금융을 독립적인 산업으로 보지 않고 돈을 끌어다 쓰는 수단으로 보는 인식도 여전하다. 금융권에서는 최근 채권·증시안정펀드를 관치금융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기업 자금 경색을 해소하고 금융시장 불안에 대비하기 위해 31조 원 규모로 조성된 이 펀드는 각 금융사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성됐다. 코로나19라는 특수성에 기댄 정부가 ‘당연하게’ 부탁한 탓이다.금융을 수단으로 바라보다 보니 정부마다 금융정책도 오락가락 ‘갈지(之) 자’를 그린다. 2015년 사모펀드 규제를 완화하며 헤지펀드 시장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금융당국은 DLF 사태 이후 태도를 바꿔 규제 강화의 칼을 꺼내들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사모펀드에 문제가 생기니 정부는 고위험 상품 판매 중단과 개인의 사모펀드 투자 제한 등의 조치부터 내놨다”며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것을 원천 봉쇄하려는 정부의 행태가 관치금융을 지속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권은 이미 오랜 관치에 길들여진 모습이다. 예대 마진이나 금리 통제 등 은행 및 금융기관이 자의적으로 판단해야 할 영역까지 간섭받는 데 익숙해진 탓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불만이 있을 때도, 문제가 터졌을 때도 ‘정부 비위를 맞춰 이번만 잘 넘기면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됐다”고 자조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문제만 생기면 규제를 강화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해결하려는 문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일관된 ‘법치(法治)’가 이뤄져야 금융권에서도 절제된 자율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치권과 금융당국의 관심사에 따라 자의적으로 규제를 강화 또는 완화하거나 문제가 터지면 희생양을 삼아 내치는 관행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혁 hack@donga.com·장윤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