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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칼럼]마지막 기대까지 저버려선 안 된다

입력 | 2020-06-05 03:00:00

현 정부 靑 중심 권력국가로 변질
여당은 위안부문제 두고 무책임한 발언
힘 모아 난국극복 약속만은 지켜주길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40년 전쯤 일이다. 연세대가 독일 정부로부터 당시 200만 달러 정도의 원조를 받아 공대를 증축했다. 독일 측 책임자는 한국에 와서 다른 기관에도 도움을 주었는데,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검소한 차림과 겸손한 자세의 여성이었다. 와서 머무는 동안 통역과 안내를 맡았던 독문과 K 교수가 준 3만 원 정도의 개인적인 선물을 받은 것밖에는 공사 간의 교제가 없었다. 그녀의 책임하에 큰 액수의 원조가 이루어졌다.

또 한 사례는, 한국유리회사가 군산에 공장을 지을 때였다. 회사는 거래 은행과 산업은행의 자금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한 간부가 찾아왔다. 산업은행보다 이자도 싸고 수속 절차를 책임질 테니까 자기들 돈을 쓰라고 해 계획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미국 은행은 아시아 여러 기업체의 신용검증 내용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유리는 A급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일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언제쯤 사회 모든 기관이 선한 질서 속에서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을 느꼈다. 기본적인 상식인 ‘의무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권리가 동반하고 권리가 주어진 곳에는 의무와 책임이 함께한다’는 질서가 자리 잡힌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 왔는가. 관·민의 관계가 상하관계로 되면서 정부는 지시하고 민간은 따라야 했다. 재무부 과장이 은행에서 만드는 고객용 달력까지 폐지시켰을 정도다. 초등학교 교사들이 밀려드는 공문 처리에 바빠 교재 준비를 할 시간이 없다고 호소했다. 중고교에서 정치이념 교육을 감행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있는가 하면, 정부가 대학교육의 자율성까지 침해하려고 한다. 지금은 교육부가 사립대 재정권까지 관여한다.

직책의 상하관계는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격이나 인권의 상하관계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가. 고위직은 권리 행사에 젖어 버리고 하위직은 의무와 책임만 가지는 폐습 때문이다. 고위직은 의무가 더 중하고 하위직에게도 응분의 권리가 있어야 한다. 인권의 존엄성과 가치는 정치나 직책에 따라 달라지거나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가. 국가적인 권리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해 입법과 사법, 행정권을 위임하고 그 권한을 위임 맡은 사람은 임기가 차면 다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복귀하는 법이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지배자로 전환하면서 권력체제로 바꾸어 버렸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자유당 정권은 4·19와 더불어 몰락했다. 박정희 정권은 공화당의 종말을 초래했다. 전두환 정권은 5·18의 비극을 만들었다. 국민이 부여한 의무를 저버린 반면에 주어진 권리를 권력으로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영삼,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권력국가는 법치국가로 바뀌기 시작해 지금까지 민주정치를 유지하고 육성해 왔다. 3년 전 국민들의 기대와 요청을 안고 출범한 현 정권은 어떻게 했는가. 이념을 앞세운 정부가 되면서 과거 어느 정부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권력정권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국민과의 약속은 자취를 감추고 청와대를 중심 삼는 권력국가로 바뀌었다. 노조를 비롯한 위성 세력들이 사회 모든 분야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치적 정의 개념은 ‘투쟁해서 승리하면 된다’는 권력독점욕에 있었다. 진보로 자처하는 시민단체들이 합세하면서 권리와 의무의 균형질서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박근혜 정부 때 국민들이 혐오했던 친박-비박의 정치현상이 문재인 정권이 되면서는 진문-친문으로 변질되고, 여당 안에는 비문이나 반문은 사라진 셈이다. 조국 사태 때 ‘친조국’과 ‘반조국’ 운동까지 시중에서 벌어졌는데 그런 창피스러운 정치 사회가 어디 있는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위안부 사태도 여당을 비롯한 정치계를 무질서의 와중으로 몰아넣고 있다. 일부 좌파 인사가 위안부 할머니에게 배후설을 제기하는 등 못 할 말을 하고 있다. 여당 대표는 “신상털기식 의혹 제기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했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선한 사회질서와 공익을 해치지 않는 자율적 선택이다. 법보다 소중한 윤리가치의 상실을 걱정하고 있다. 지금 국민들의 마지막 기대는 대통령이 발표한 경제정책이다. 경제 실무자들과 힘을 모아 난국을 극복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주기 바란다. 70년 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을 현 정권이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정당인이나 공직자는 정치나 공직을 위임 맡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공직자들은 공직이 국민을 위한 봉사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