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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 그라임스, 그리고 여섯 개의 다리[임희윤 기자의 죽기 전 멜로디]

입력 | 2020-06-05 03:00:00


일론 머스크의 여자친구이자 싱어송라이터인 그라임스가 지난해 발표한 ‘Violence’ 뮤직비디오 장면. 머스크와 그라임스는 올 5월 출산한 아기 이름을 ‘X Æ A-12 머스크’라 지어 화제가 됐다. 강앤뮤직 제공

‘절대 죽지 않고 싶다면/그대, 접속하고 마음을 업로드하라/어서, 넌 살아있는 것도 아니니/백업되지 않는다면, 드라이브에 백업…’(‘We Appreciate Power’ 중)

임희윤 기자

세상 모든 사람이 여섯 다리만 건너면 모두 연결된다는 ‘케빈 베이컨의 6단계 이론’에 제기되는 허구성 논란과 상관없이 나는 테슬라 자동차로 유명한 미국의 사업가 일론 머스크와 단 세 다리 만에 연결된다는 사실을 최근 깨달았다. 머스크가 창업한 ‘스페이스X’가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유인우주선 ‘크루 드래건’을 국제우주정거장에 도킹시키며 민간 우주여행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가 대단한 부자라고 하니 꽤 설렌다.

#1. 이유는 이렇다. 머스크의 현재 여자친구는 캐나다 출신의 클레어 부셰(32)다. 부셰는 그라임스(Grime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꽤 유명한 가수. 그라임스는 때론 격렬한 인더스트리얼 록(industrial rock)과 청량감 있는 신스팝(synth-pop)을 결합해 노래한다. 종종 공포영화에나 어울릴 비명 소리도 삽입한다. 작사 작곡 편곡은 물론이고 미술과 뮤직비디오 연출까지 담당하는 ‘DIY-키치-컬트’ 음악가. 거침없는 혼종(混種)음악에 대중적인 멜로디까지 결합해 평단의 사랑을 받는다. 4집 ‘Art Angels’(2015년)는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고, 그해 영국 유명 음악잡지 NME가 ‘올해의 앨범’ 1위로 뽑았다. 뉴욕타임스도 ‘2015년의 앨범’ 3위에 올려놨다.

#2. 케빈 베이컨의 관점으로 보자면 중요한 연결고리가 이쯤에서 등장한다. 그라임스는 케이팝의 열혈 팬이다. 케이팝이 미국 주류 사회에 침투하기 훨씬 이전부터 공공연히 케이팝을 동경하고 패러디하며 응용했다. 뮤직비디오, 안무, 편곡, 가창에 그 영향을 대폭 드러냈다. 2013년과 2016년 내한공연에서도 케이팝 군무를 연상시키는 춤을 선보였고, 본인이 좋아한다는 지드래곤, CL과 만나기도 했다. 급기야 2018년에는 한국 여성그룹 ‘이달의 소녀 yyxy’의 미니앨범 타이틀 곡 ‘Love4eva’에 피처링했다. 앞으로 더욱더 상용화할 민간 우주선에 어쩌면 머스크 여자친구의 친구인 케이팝 스타들이 우선순위로 타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3. 상상의 나래란 긴 법이다. 케이팝 가수를 아는 케이팝 관계자와 알고 지내는 나는 대강 세 다리, 그라임스는커녕 슬라임에도 관심이 없는 우리 어머니도 네 다리만 거치면 머스크와 연결된다는 생각을 하니 좀 얼떨떨하다.

#4. 서두에 오묘한 가사 일부를 적은 그라임스의 노래, ‘We Appreciate Power’는 올 2월에 그가 낸 5집 앨범 ‘Miss Anthropocene’의 수록 곡이다. 앨범명은 ‘미스 인류세(人類世)’란 뜻이다. 키치적 시청각 연출에 현학적 콘셉트를 콜라주하는 것도 그라임스의 특징. 그라임스는 한때 캐나다의 하버드라 불리는 맥길대에서 신경과학과 러시아어를 복수 전공했다. 머스크와 그라임스를 연결해준 것도 다름 아닌 사소한 학술적 농담이었다.

#5. 머스크는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로코의 바실리스크’라는 음모이론에 관심이 많았다. 혁신적 인공지능(AI)이 자신의 육화를 돕지 않는 인간을 고문한다는 내용. 머스크는 로코(Roko)를 미술양식인 로코코(Rococo)로 비틀어 재치 있는 농담을 하고 싶었다. 구글에 ‘로코코 바실리스크’를 쳐 넣은 순간, 아뿔싸…. 천하의 ‘나, 머스크님’보다 무려 3년 전에 이 첨단 농담을 개발한 이가 있음을 발견했으니….

#6. 그가 그라임스였다. 이미 2015년 ‘Flesh Without Blood’ 뮤직비디오에 로코코 바실리스크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던 것. 머스크와 그라임스는 이를 계기로 메시지를 나누기 시작했고 농담을 나누었고 사랑을 나누게 됐다.

#7. ‘We Appreciate Power’는 다름 아닌 로코의 바실리스크 이론에 대한 곡이다. 존엄하신 AI의 뜻을 받자와 선전선동을 하는 걸그룹이 됐다고 상상하며 가사를 썼다고 한다. 북한 모란봉악단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복잡한 이론도 요란한 비주얼도 모두 괴팍한 예술의 오브제 정도로 뽑아 쓰는 그라임스가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만 둘 사이의 화학작용은 궁금하다. 소름 끼치는 디스토피아와 육감적인 댄스 리듬이 피와 살처럼 뒤섞여 펄떡이는 그라임스의 예술세계에, 머스크는 요즘 어떤 조언과 영감을 주고 있을까.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