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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고전영화에서 백인여성만 유독 빛나는 까닭

입력 | 2020-06-06 03:00:00

◇화이트/리처드 다이어 지음·박소정 옮김/430쪽·2만8000원·컬처룩




영화 ‘비욘드 더 포레스트’의 제니(왼쪽)와 로사. 영화 속 악하고 관능적인 로사의 사악함은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와 함께 인종적으로 열등한 제니와 친밀감을 형성한다는 데서 암시된다. 컬처룩 제공

“금발에 붉은 뺨을 지닌 에바가 흰옷을 입고 다가오자 태양 빛이 에바의 뒤에 후광을 만들어주었다.”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년)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이상화된 백인 여성의 이미지를 잘 구현하고 있다. 백인 여성은 빛난다. 그것도, 눈이 부시게. 이러한 시각적 이미지는 사진이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활용되면서 ‘백인성(性)’ ‘백인다움’을 재현해왔다. 시각예술에서 조명과 화장술은 극단적으로 밝고 흰 동시에 번들거리지 않게 광채가 나는 백인다운 피부를 구현해내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백인 여성이 받는 빛은 미덕 순수 사랑을 상징한다.

이 책은 영화학을 전공한 저자가 서구 문화에서 특권적 위치를 형성해온 백인성이 특히 영화, 사진 같은 시각예술에서 어떻게 반복적으로 재현되면서 불평등 구조를 고착화시켰는지를 진단했다. 1997년 출간돼 백인성 연구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저자는 백인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백인을 ‘인간의 표준’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백인우월주의를 먼저 논박한다. 유색인종의 특성과 그들이 받는 불평등한 대우에 대해서는 많이 논의됐지만 정작 백인 자체에 관해서는 당시만 해도 많이 주목받지 못했다. 백인은 인종의 하나로 간주되지 않고 언제나 ‘그냥 인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백인성 자체가 인간의 조건이었다.

백인성의 구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색이다. 백인은 실제로 하얗다고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졌다. 하지만 ‘코카시아 인종’ 같은 용어 대신 백인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흰색은 빛의 색이며 중립성, 도덕, 계몽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백인화는 르네상스 말기에 성취됐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비(非)유대인화 정도를 떠나 푸른 눈에 밝은 피부라는 백인적 조합을 완성했다. 명백한 이상으로서의 흰색을 구현하기 위해서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은 백인을 부각시키는 조명 기술을 완성했다. 사실 이런 조명 시스템에서는 빛 반사율이 낮은 다른 인종이 매력적으로 연출되기 어렵다.

백인 여성이 빛의 화신으로 묘사됐다면 백인 남성은 다양한 영화에서 마치 조각상 같은 근육질의 견고한 몸을 가진 영웅으로 그려진다. 근육질 몸은 제국주의적 진취성을 상징한다. 심지어 ‘타잔’ 같은 영화는 백인 남성이 식민주의적 권력과 자연에 대한 친밀성을 모두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은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모든 특혜를 누리는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백인 내부에서도 백인성에 대한 개념과 정의가 수시로 달라졌다는 것. 아일랜드인이나 유대인은 시대에 따라 백인이 되기도 하고 그 집단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최근 인종차별 문제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인종차별적 문화를 지속시키는 백인성의 기원을 살펴보는 일은 어느 때보다 의미 있어 보인다. 백인성을 인류의 보편 기준으로 만들어온 은밀한 문화적 작동기제를 냉철하게 직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례를 들어 글을 풀어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