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한명숙 불법자금 재조사’ 추진 “수사검사가 불리한 증언 강요”… ‘진술 회유’ 이미 중앙지검 배당 檢, 당시 수사라인 조사할 방침, “공수처 수사가능성 저울질” 전망도 檢내부 “강압수사 주장만으로 낙인”… 법원 “의혹만으로 재판불신 우려” 일각선 “檢의 표적수사” 지적, “檢개혁 동력 위한 카드” 해석도
“(한 전 대표를 외면하며) 인터넷 검색해 보면 다 나와요.”(검사)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흘 뒤인 2011년 11월 3일 서울중앙지법의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검사의 냉랭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한 전 대표가 “저 때문에 한 전 총리가 누명을 썼다”며 검찰에서 했던 진술을 법정에서 번복하는 바람에 재판에서 완패한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한 전 대표는 검사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고 반응을 살폈다. 이후 한 전 총리는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2015년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한 전 총리의 유죄를 확정했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한 전 대표는 2018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그렇게 다 끝난 줄로만 알았다.
○ 되살아난 9억 원 수수 사건
한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9억 원 수수 사건을 둘러싼 진상조사와 재심 여론의 파장이 만만치 않다. 177석 거대 여당 대표, 원내대표는 물론이고 검찰 사무의 감독권자인 추미애 법무부 장관까지 가세해 ‘친노(친노무현) 대모(代母)’ 격인 한 전 총리 사건의 진상조사와 재심 여론에 힘을 싣고 있다.수감 중인 최모 씨 등이 “수사 검사가 한 전 총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했다”며 제기한 진정 사건은 이미 서울중앙지검 인권감독관에 배당됐다. 최 씨는 “검찰에 협조하자 검사들이 공판검사와 소통해 다른 사건의 구형량을 낮춰주는 등 각종 편의를 봐줬다”고 주장했다. 최 씨는 사기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한 전 대표의 감방 동료였다. 그는 법정에서 “그러신 분이 한 전 총리에게 대놓고 욕을 했느냐, ‘나이 먹고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고 내게 그러지 않았느냐”며 진술을 번복한 한 전 대표를 몰아세우기도 했었다.
검찰은 그때와는 달라진 최 씨의 진술을 듣고 당시 수사 라인을 조사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한 전 총리에게 불리한 법정 증언을 강요하고 그 대가로 수감 중인 이들에게 편익을 제공해 준 의혹(모해위증교사, 직권남용)을 살펴보게 된다. 진상조사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한 전 총리 사건 수사 가능성을 저울질해 보는 점검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이미 2015년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한 전 총리가 17대 대선후보 경선 비용 명목으로 2007년 3차례에 걸쳐 9억 원을 받은 혐의 중 3억 원(1차 수수)은 전원일치로 유죄로 확정했다. 6억 원(2, 3차 수수)은 다수 의견과 반대 의견으로 나뉘었지만 역시 유죄가 확정됐다. 한 전 대표의 위증 사건도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 17일 유죄와 징역 2년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한 전 대표의 위증 사건은 최강욱 변호사(현 열린민주당 대표)가 변호를 맡았었다.
○ 진술 회유 의혹 재수사 단초 될까
검찰 수사 과정에 대한 의심은 대법관 5명(이인복, 이상훈, 김용덕, 박보영, 김소영)의 반대 의견에서도 엿보인다. 이들은 “한 전 대표는 2010년 3월 31일 서울구치소 이감, 4월 1일 조사 후 증인신문 기일(2010년 12월 20일)까지 70회 이상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검사가 한 전 대표의 진술이 번복되지 않도록 부적절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고 지적했다.수사팀에선 수감 중이던 한 전 대표가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5개월도 전인 2009년 11월 27일 구치소 접견에서 모친에게 “한 전 총리에게 3억 원을 줬다”고 한 사실이 이 사건의 ‘스모킹 건’ 역할을 했다고 본다. 실체적 진실이 수사와 판결로 규명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 전 대표는 진술을 번복하면서 9억 원의 용처를 최초와 다르게 진술했는데, 이에 대해선 검찰과 법원이 모두 허위 사실을 진술했다고 결론을 냈다. 더욱이 한 전 총리의 7급 비서 김모 씨는 한 전 대표 측에서 법인카드, 그랜저 승용차, 사무실 운영비 명목으로 매달 1000만 원, 지방 유세용 버스 등을 지원받았다.
녹취록에서 한 전 대표의 모친은 “김 씨하고 총리 그런 ○ 같은 ○들 만나서 얘기 확고하게 해. 아주. 뭐 뒤돌아볼 것도 없어. 그냥 자를 것 잘라야지”라고 말했다. 이어 “왜 한 달에 1000만 원씩 주고서 우리가 고통을 당해”라고도 했다. 모친이 “김 씨에게는 어떻게 해야 될까”라고 묻자 한 전 대표는 “제가 나가서 잡아야 돼요. 여기서는 안 돼”라고 했다.
한 전 대표 측이 발행한 수표 1억 원을 한 전 총리의 여동생이 전세자금으로 사용한 금융기록도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여동생 한모 씨 등은 “김 씨에게 빌린 뒤 수표 4장으로 갚았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은 “종전까지 아무런 거래도 없던 사이로 보인다.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며 기각했다.
한신건영 경리부장 정모 씨가 작성한 이른바 ‘B장부’, 채권 회수 목록 세부 자료에는 한 전 총리를 뜻하는 ‘한’, ‘의원’ 등이 기재됐다. 정 씨는 “‘은팔찌 차고 안 차고는 너 하기 나름이다’라며 한 전 대표가 주의를 줬다”고 증언했다. 채권 회수 목록에 기재된 하나은행 지점장이 대출 알선 명목으로 2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1년이 확정될 정도로 장부에 기재된 내용의 신뢰도는 높다고 평가받았다.
○ 확정 판결 재심 거론…“재심 어려울 듯”
일선 법관들은 “현재 상태로는 재심 사유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형사소송법 제420조는 ‘원판결에서 증거로 쓰인 증언, 감정 등이 확정 판결에 의해 허위인 것이 증명된 때’, ‘유죄 선고를 받은 자의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됐을 때’, ‘원판결에 관여한 판검사들이 직무와 관련해 죄를 범해 유죄가 확정된 경우’ 등을 재심 사유로 정해 놓았다.확정 판결에 대한 여권의 비판이 던진 파장은 커지고 있다. 분쟁과 갈등의 최종 해결장이라 불리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의혹 제기만으로 과거의 재판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비칠까 염려된다”고 했다. 검찰은 유죄가 확정된 사건 기록에서 검사의 위법 과실을 확인하는 작업에 나서야 할 형편이다. 검찰 관계자는 “금품 공여자 진술을 객관적 증거와 비교, 대조하는 수사 기법은 경찰이나 앞으로 출범할 공수처도 비슷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며 “강압 수사 주장만 하면 모두 ‘실패한 수사’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냐”고 말했다.
○ “검찰 개혁 연장선”
과거의 검찰 특별수사 관행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사건 수사가 한 전 총리가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5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무죄가 유력해진 상황에서 시작된 점을 두고 검찰의 ‘표적 수사’, ‘오기 수사’라는 논란이 제기됐었기 때문이다. 여권에선 “검찰의 수사 관행을 되돌아볼 필요는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 전 총리는 2015년 8월 20일 유죄 확정 판결 직후 “지난 6년간 검찰의 표적·기획 수사와 정치적 기소로 죄 없는 피고인으로 살아야만 했다”며 “검찰은 (대한통운 사장 관련) 1차 사건의 1심 무죄 판결이 선고되기 하루 전날 또다시 별건을 조작해 (한 전 대표 관련) 2차 정치적 기소를 자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전 대표는 “검찰이 변호사 질문 피하는 법, 자금 제공 횟수, 통화 횟수 관련 증언을 훈련시켰다. 자신이 없으니 계속 그렇게 시킨 것 아니냐”, “옛날처럼 쥐어박고 때리고 하는 것만 강압 수사냐”고 주장했다.
여권의 거듭된 강공 드라이브를 검찰 개혁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갓 개원한 21대 국회에서도 각종 검찰 개혁 법안 통과에 필요한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권이 한 전 총리 사건의 재조사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장관석 jks@donga.com·황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