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온 작물들에게 사랑의 말을 퍼붓는다. 해가 갈수록 루바브와 세이지, 로즈메리, 아스파라거스 같은 것들이 더 넓게 자리를 차지하더니 부추나 머위는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없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식 텃밭이 되어버렸다. 나는 아무리 봐도 먹을 것이 없는데 그는 매일 뭔가를 잔뜩 따가지고 온다. 파이를 해 먹자, 잼을 만들자, 샐러드를 만들자. 요구 사항도 다양하다.
후다닥 흐르는 물에 씻어 먹어보라고 내 코앞에 가져오기도 한다. 요즘엔 매일 생루바브를 꺾어온다. 루바브는 주로 잼을 만들거나 파이를 구워서 먹는 식재료인데 새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레몬보다 더 시어서 살짝이라도 씹는 순간 온통 얼굴이 찌푸려진다. 생긴 것은 머위 같은데 맛은 새콤한 과일 맛이 난다. “이걸 먹으니 아빠 생각이 난다, 아니,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여름 내내 생루바브 껍질을 벗긴 뒤 이렇게 싹둑싹둑 잘라서 설탕을 듬뿍 뿌려줬지!” 레돔은 이렇게 말하며 설탕 뿌린 루바브를 맛나게 먹는다. 접시에 초록색 물이 흥건하게 고인다.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온 혓바닥에 침이 고여 올라온다. 몇 년 전 시아버지가 한국에 오셨을 때 직접 씨를 뿌려주었는데 이렇게 자랐다.
“저희 어머니는 마흔 살에 남편을 잃고 자식 셋을 혼자서 키웠어요. 인생의 거친 파도를 건너느라 슬퍼할 겨를도 없었죠. 그렇다고 인생 실패했다, 외롭다,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제발 그만하시고 저 밭이라도 좀 가꾸세요.” 위로 대신 쌀쌀맞게 쏘아붙이는 며느리를 야속하게 보았지만 아버님은 떠밀리듯이 밭으로 나갔다. 맨 먼저 발견한 것이 루바브였다. “이것 봐라. 밭에 루바브만 가득하네.”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텃밭은 사시사철 온갖 먹을 것으로 넘쳐났는데 다 사라져버리고 루바브만 커다란 초록색 방석처럼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아버님은 루바브 줄기를 꺾어 한입 먹었다. 아이고, 시어라! 남이 먹는 것만 봐도 내 입에는 침이 고였지만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슬픔은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토마토랑 딸기를 좀 심어야겠어.” 텃밭을 한 바퀴 돈 뒤 이렇게 말했다.
“올여름엔 루바브 파이를 열 번은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싹아싹 새콤한 생풀을 잘도 먹는 걸 보니 레돔이 참 멀리서 온 남자라는 것이 실감 난다. 한여름 한국 뙤약볕을 받으며 잘도 자라는 루바브가 그저 고맙다. 저것이라도 없었더라면 이 남자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