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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일하는 국회 만들려면 의원 입법도 규제 심사해야[광화문에서/길진균]

입력 | 2020-06-12 03:00:00


길진균 정치부 차장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경제 부처 고위공무원은 국회 얘기가 나오자 분통을 터뜨렸다. 국회에서 의원입법 형태로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법안 중에 상당수는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였다. 법안 하나를 국회에 제출하려면 당정 협의, 공청회, 규제심사,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등을 거쳐야 하고 그 때문에 공무원들은 세종시에서 정부서울청사와 국회를 수없이 오가고 있는데 의원들이 뚝딱 만들어내는 황당한 법안들을 볼 때마다 맥이 탁 풀린다고 했다.

법을 만드는 일은 국회의원 본연의 업무다.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걸 탓할 수는 없다. ‘일하는 국회’가 강조되면서 의원입법 건수도 크게 늘었다. 20년 전인 16대 국회만 해도 1651건에 불과했던 의원입법은 20대 국회에선 2만1594건을 기록했다. 의원입법이 늘어나는 것은 다양한 입법 수요에 대한 국회 차원의 적극적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성과도 나쁘지 않다. 20대 국회 의원입법 가결 법안은 1437건이었다. 정부입법 가결 법안 305건의 네 배가 넘는다.

문제는 커지는 국회의 ‘규제 본능’이다. 정부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20대 국회에서 의원입법 형태로 발의된 법안 2만1594건 가운데 20%에 가까운 3924건이 규제 법률이다. 정부의 규제심사를 거쳤다면 발의 자체가 어려웠을 수 있는 법안들이다.

의원입법은 광범위한 의견수렴 절차를 밟아야 하는 정부입법과 달리 손쉬운 발의가 가능하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176명 전원이 참여하고 있는 법안 발의용 단체 텔레그램방도 운영하고 있다. 한 의원이 법안 요지서를 띄우고, 이에 다른 동료 의원 10명 이상만 동의하면 1시간도 채 안 돼 법안 발의가 가능하다.

이는 편리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졸속 입법 논란을 부르기도 한다. 20대 국회에서 통과된 ‘n번방 사건방지 후속법안’(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네이버 등 기업에 온라인상의 불법 촬영물에 대한 차단과 삭제 의무를 부과했다. 업계는 “마치 택배기사에게 배달 물건 중 폭탄이 있는지 확인해 폐기하라는 것과 같다”며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n번방 사건을 불러온 텔레그램과 같은 해외 사업자를 단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의원들도 입법 과정에서 이 같은 문제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폭발하는 민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일단 규제부터 강화한 법을 통과시켰다.

앞으로가 문제다. 21대 국회 시작과 함께 11일까지 이미 340건의 의원입법이 제출됐다. 20대 국회 같은 기간 187건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된다. 여기에 176석 슈퍼 여당으로 거듭난 민주당은 개원과 동시에 ‘일 욕심’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규제 혁파의 필요성을 연일 강조하고 있지만 의원입법만큼은 사각지대다. 의원입법에 대한 규제영향평가를 실시할 때가 됐다. 민주당은 국회법을 바꿔 법안의 체계·자구 심사를 국회사무처 또는 입법조사처 내 전문 검토기구에 맡기겠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법안에 대한 규제심사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법안 발의 건수가 많다고 ‘일하는 국회’라고 칭찬받기 어렵다. 일하는 국회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일하는 국회’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