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폭력에 넌더리 난 시민들 약탈 방관한 공권력에 또 분노
박용 뉴욕 특파원
수갑까지 차고 제압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씨의 목을 숨이 넘어갈 때까지 8분 46초간 무릎으로 짓누른 백인 경찰의 야만적 폭력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는 크고 깊었다. 뉴욕주 시러큐스에서 왔다는 케일라 힐턴 씨는 “무고한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지금은 내가 백인이라는 게 부끄럽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복되는 경찰 폭력과 시위에 넌더리가 난 뉴욕 시민들은 정작 필요할 때 경찰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다시 한 번 좌절했다. 지난달 31일 밤부터 이달 2일 새벽까지 뉴욕시에서 맨해튼의 ‘심장부’인 미드타운과 패션 1번지 소호, 서민 주거지인 브롱크스 등에서 수백 곳의 상점이 약탈을 당했다. 약탈을 ‘가난한 자들의 부자에 대한 분노’라고 미화하는 철없는 좌파들도 있지만, 약탈자들은 시위대들과 다른 사람들이었다. 3억 원이 넘는 고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가게 앞에 대고 훔친 물건을 실어간 간 큰 도둑들도 있었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뉴욕시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3만6000명의 경찰관이 있다. 한 해 경찰 예산으로 북한 국방비(16억∼33억 달러 추정)보다 많은 60억 달러를 쓴다. 그런데도 뉴욕시의 심장부인 맨해튼 미드타운까지 약탈꾼들에게 탈탈 털리는 걸 막지 못했다. 그 사이 시민들은 평생 일군 재산을 잃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연일 이어지는 시위로 고생한 일선 경찰관들도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 폭력과 지휘부의 무능에 화가 난 시민들은 경찰 예산을 줄여 저소득층 사회복지를 늘리자는 ‘디펀드 폴리스’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등 보수진영 인사들은 민주당 소속 시 당국의 무능으로 몰고가며 정치 쟁점화하고 있다.
세금을 내고도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한 상인들은 자체 경비원을 고용해 가게를 지키기 시작했다. 경제 재개를 준비해야 할 뉴욕 5번가의 고급 백화점은 유리창과 입구에 나무판자를 대고 철조망을 얹은 철제 울타리에 수십 명의 경비원까지 ‘3중 보호막’을 쳤다. 코로나19 봉쇄령으로 인적이 뚝 끊겼을 때도 없던 일이었다. 약탈이 휩쓸고 간 맨해튼 32번가 코리아타운의 한식당 ‘희’의 깨진 유리창 옆에는 9일 한국 소주 광고와 함께 “폐업했습니다. 제발, 제발, 유리창을 깨지 말아주세요. 제발”이라고 손으로 직접 눌러 쓴 안타까운 영문 호소문이 걸려 있었다.
뉴욕시는 경찰이 제 역할을 못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단 며칠 만에 보여줬다. 6월 뉴욕 도심 상점의 ‘깨진 유리창’과 방호막들은 시민을 위한 공권력이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