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미움의 물결’을 막는 힘[Monday DBR]

입력 | 2020-06-15 03:00:00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독기로 오염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다툼을 다룬다. 코로나19의 대유행과 함께 인종주의 범죄가 늘어나는 현시대를 내다본 듯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스틸컷

미야자키 하야오(79)의 초기 대표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년)는 오염된 세계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거대한 곰팡이가 끝없이 자라나 숲을 이루고 유독한 공기를 내뿜는데 그 독성이 어찌나 강한지 사람이 이 독기를 5분 이상 흡입하면 그대로 죽고 만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마스크를 끼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독기와 싸우는 모습이 꼭 오늘날의 세계를 내다보기라도 한 듯하다.

그런데 원작에서 ‘쇼키(장氣)’라고 부르는 이 오염된 공기를 우리말 자막은 한자어 발음대로 ‘장기’가 아니라 ‘독기(毒氣)’라고 옮긴다. 현대 한국인에게 너무 낯선 표현이라 의역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사실 장기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바닷가 같은 습한 곳에서 장(장)이라고 하는 특별한 기운이 올라온다고 생각했다. 5분 만에 죽지는 않지만 이 기운에 노출되면 쇠약해지다가 끝내는 죽고 만다.

이 장(장)병은 많은 전통시대 병명이 그렇듯 중국에서 처음 쓰인 말이다. 위진(魏晉·220∼589) 시기를 즈음해 이 글자가 처음으로 지면에 등장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서진(西晉·265∼316) 멸망 후 양쯔강 하류지역, 곧 강남(江南)지역으로 대거 이주한 북방인들이 해당 지역의 풍토병에 호되게 당한 뒤 그 병을 부를 말을 고안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강남은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등이 들어선 부유한 지역이지만 서진 당시에는 미개발 늪지대에 불과했다.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북방인들은 말라리아를 필두로 한 각종 수인성(水因性)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을 것이고, 자신들의 이주에 걸림돌, 즉 장애가 된다는 뜻에서 이 병을 장(장)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렇게 강남지역에서 데뷔한 장이라는 질병은 그 후 한족 중국인의 활동 무대가 남쪽으로 내려갈 때마다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다. 후베이(湖北)와 후난(湖南) 부근도 차츰 장병으로 오명을 얻었고 쓰촨(四川) 남부와 구이저우(貴州) 일대도 그러했다. 한족의 남하와 함께 장병 전선(戰線)이 남하했다는 사실은 이 질병의 사회적 성격을 시사한다. 먼저, 이 병은 한(漢)족이 겪는 병이다. 한족 기록자들은 낯선 남방에서 오랑캐들 사이에 유행하는 병에 걸려 고통 받은 본인과 지인들의 경험만을 전할 뿐, 분명히 이 병에 걸려서 고생했을 ‘오랑캐’들에 관해서는 별말이 없다. 둘째, 이 병은 남방병이다. 누군가가 북방에서 무언가에 감염돼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으면 다른 병명이 붙는다. 하지만 남방에서 무언가에 감염돼 같은 증상에 시달리다가 죽으면 으레 장병에 걸려 죽었다며 두려워한다. 애초에 북방인이 남방에 와서 걸렸던 풍토병에서 유래한 이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병이 북방에서도 유행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셋째, 사람들이 특정 지역 특정 민족과 이 병을 강하게 연결시켜서 상상하기 때문에 이 질병에 관한 담론에는 인종주의적 색채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대마다 장병으로 악명 높은 지역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당(唐·618∼907)나라 이후로 장병으로 가장 악명 높았던 곳은 중국 대륙의 남방 한계선인 영남(嶺南)지방, 곧 오늘날의 광둥(廣東)과 광시(廣西)였다. 영남 이전에는 푸젠이 장병의 온상이었다. 하지만 송나라(960∼1279)가 들어서면서 푸젠은 장병 유행지의 오명을 영남지방에 양보하고 ‘북방’에 포함된다. 이 지역의 풍토병이 사라져서라기보다는 한족 상류층 문화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이다. 푸젠의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 남방과 북방을 가르는 기준이란 한족 상류층 문화에 얼마나 동화됐느냐였고 과거시험 성적은 이 동화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올 들어 신종 전염병인 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로 세계 각지에선 인종주의 범죄가 급증했다고 한다. 과학의 발전도 전염병에 올라타 함께 확산되는 미움의 물결은 막지 못한 것이다. 과학이 해내지 못한 일을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해낼 수 있을까. 나우시카는 연민과 우애라고 했다.

이 원고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298호에 실린 ‘전염병만큼 무서운 미움의 물결’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안동섭 중국 후난대 악록서원 조교수 dongsob@unix.ox.ac.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