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독기로 오염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다툼을 다룬다. 코로나19의 대유행과 함께 인종주의 범죄가 늘어나는 현시대를 내다본 듯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스틸컷
그런데 원작에서 ‘쇼키(장氣)’라고 부르는 이 오염된 공기를 우리말 자막은 한자어 발음대로 ‘장기’가 아니라 ‘독기(毒氣)’라고 옮긴다. 현대 한국인에게 너무 낯선 표현이라 의역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사실 장기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바닷가 같은 습한 곳에서 장(장)이라고 하는 특별한 기운이 올라온다고 생각했다. 5분 만에 죽지는 않지만 이 기운에 노출되면 쇠약해지다가 끝내는 죽고 만다.
이 장(장)병은 많은 전통시대 병명이 그렇듯 중국에서 처음 쓰인 말이다. 위진(魏晉·220∼589) 시기를 즈음해 이 글자가 처음으로 지면에 등장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서진(西晉·265∼316) 멸망 후 양쯔강 하류지역, 곧 강남(江南)지역으로 대거 이주한 북방인들이 해당 지역의 풍토병에 호되게 당한 뒤 그 병을 부를 말을 고안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강남은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등이 들어선 부유한 지역이지만 서진 당시에는 미개발 늪지대에 불과했다.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북방인들은 말라리아를 필두로 한 각종 수인성(水因性)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을 것이고, 자신들의 이주에 걸림돌, 즉 장애가 된다는 뜻에서 이 병을 장(장)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대마다 장병으로 악명 높은 지역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당(唐·618∼907)나라 이후로 장병으로 가장 악명 높았던 곳은 중국 대륙의 남방 한계선인 영남(嶺南)지방, 곧 오늘날의 광둥(廣東)과 광시(廣西)였다. 영남 이전에는 푸젠이 장병의 온상이었다. 하지만 송나라(960∼1279)가 들어서면서 푸젠은 장병 유행지의 오명을 영남지방에 양보하고 ‘북방’에 포함된다. 이 지역의 풍토병이 사라져서라기보다는 한족 상류층 문화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이다. 푸젠의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 남방과 북방을 가르는 기준이란 한족 상류층 문화에 얼마나 동화됐느냐였고 과거시험 성적은 이 동화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올 들어 신종 전염병인 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로 세계 각지에선 인종주의 범죄가 급증했다고 한다. 과학의 발전도 전염병에 올라타 함께 확산되는 미움의 물결은 막지 못한 것이다. 과학이 해내지 못한 일을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해낼 수 있을까. 나우시카는 연민과 우애라고 했다.
이 원고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298호에 실린 ‘전염병만큼 무서운 미움의 물결’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안동섭 중국 후난대 악록서원 조교수 dongsob@unix.ox.ac.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