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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연평도’ 데자뷔로 가는 6월의 충격[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입력 | 2020-06-18 14:00:00


문재인 대통령이 결국 ‘폭발’한 것일까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이은 북한의 17일 동시다발적 ‘말폭탄’에 대한 대응은 격앙돼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을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문 대통령이 내놓은 6·15공동선언 20주년 기념사에 대해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철면피한 궤변”이라고 조롱했죠. 윤도한 대통령국민소통수석은 김여정을 겨냥해 △무례하고 △몰상식하며 △사리 분별없는 행동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외교안보 원로들과의 오찬에서도 문 대통령은 “도가 지나친 것 같다” “굉장히 실망스럽다”며 좌절감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 하겠다”는 뜻을 밝히긴 했지만 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전직 통일부 장관 및 원로들과 오찬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하지만 문재인 정부를 더 당혹케 한 부분은 현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추진한 대북 특사(特使) 파견계획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평창의 봄,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 남북미 판문점 회동 등을 가능케 했던 ‘전가의 보도’ 격이었던 특사카드가 허망하게 날아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죠. “전례 없는 비상식적 행위이며 특사파견 취지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처사”라는 청와대의 반응은 실망의 깊이를 느끼게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까발리기’가 청와대의 표현처럼 “전례 없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김정일 체제의 최고국가기관이었던 국방위원회는 2011년 6월 당시 이명박 정부의 3차례 정상회담 제안 사실을 일방적으로 공개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북한은 그해 5월 베이징 비밀접촉을 폭로하면서 통일부 김천식 정책실장, 홍창화 국가정보원 국장, 김태효 대통령대외전략비서관 등 접촉자 명단까지 내놨습니다.

더 심각했던 것은 폭로의 내용이었습니다. 북한 국방위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과 관련해 남측이 ‘제발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이라도 만들자’고 애걸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는 “정상회담 개최를 빨리 추진하자고 하면서 돈 봉투까지 거리낌 없이 내놓다가 망신을 당했다”고도 했죠.

이명박 정부는 이같은 주장을 모두 부인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2015년 내놓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정상회담의 대가로 5억~6억 달러 규모의 현물지원을 해달라는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아 회담이 무산됐다”고 적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특사로 맹활약했던 투톱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왼쪽)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2018년 9월 백두산 기념촬영. 평양=사진공동취재단


9년 전의 일이고 북한의 최고 통치지도 김정은으로 바뀌었지만 2차례의 폭로에서 2가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북한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해 모두 △간청 △애걸 △구걸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극구 남북수뇌상봉이라고 하고, 우리 대통령에 대해 “수령님이 만나 주시었다”며 시혜 베풀 듯 하는 북한 체제의 특성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두 번째는 더 이상 “남조선 당국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시절 북한의 공언(公言)은 현실화 됐습니다. 정상회담 제안 사실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시점이 임기 종료 1년 9개월 전의 일이었습니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2022년 3월이 될 것으로 보이니 남은 시간을 얼추 비슷해 보입니다.

판문점에서 2차례, 평양에서 1차례 등 이미 임기 중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한 문재인 대통령.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등 ‘보수’ 대통령들이야 상종을 안 하겠다는 식의 절연(絶緣)통보를 받은 적이 있지만, 진보 대통령으로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듣지 않았던 험한 말을 듣게 된 것이 달갑지 않을 듯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계속 인내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길을 모색하겠다”고 했으니 우리가 먼저 나서 남북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남북관계의 키를 북한이 쥐고 있다는 점입니다. 혹여 2010년 김정일처럼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류의 군사도발 카드를 사용한다면 문재인 정부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겠죠. 자칫 천안함-연평도 사태 이후 남북관계 암흑기의 ‘데자뷔’가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옵니다.

2018년 4월 판문점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는 임종석 비서실장 판문점=사진공동취재단

정의용 대통령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이라는 투톱 콤비가 김씨 남매의 ‘선택’으로 사실상 수명을 다한 것은 씁쓸한 대목입니다. 남북관계의 핵심 플레이어의 운명이 결국 북한의 손에 달려있다는 점이 또다시 입증된 셈이기 때문입니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 우상호 의원 등 586 운동권 그룹이 후임 물망에 오르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북한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는 그 누가 메신저 역할을 자임한다 해도 김정은 남매에게는 매력적인 카드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남북간에 있었던 일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장금철 통전부장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 부장급(정치학 박사 수료)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