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4월 23일
플래시백
일제 강점기, 이름 없는 민초(民草)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는 조선총독도, 칼 찬 일본순사도 아니라 일제의 앞잡이, 친일파였습니다. 우리 사정을 잘 아는 동족이니 뭐라도 숨길 수가 없었으니까요. 독립운동단체 신한독립당의 1923년 조사에 따르면 친일파는 전국적으로 7254명에 이르는데 순사가 가장 많고 이어 밀정, 면장·면서기, 군 참사, 군수 등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친일파였을까요? 동아일보는 1922년 4월 9일자 사설 ‘약자의 비애-배일과 친일’에서 ‘자신의 복을 구하려고 양심을 기만하는 자는 친일, 자기 양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는 배일(排日)’이라고 했습니다.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기준이 좀 애매하죠?
좀 더 구체적인 것은 1921년 4월 23일자 ‘삼포살(三砲殺)을 선전’이라는 제목의 짧은 기사에 나옵니다. 3·1운동 직후 항일의병 출신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대한독립단 단원들이 6명씩 무리지어 다니며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하면 친일파로 보고 포살(총살)키로 했다는 내용입니다. △적의 견마(犬馬)가 돼 동포의 피를 빠는 자 △적과 내통하고 무기를 제공하는 자 △일본 학교를 경영해 아이와 청년들이 적에게 접근하게 하는 자입니다. 실제로 암살단을 조직해 친일세력을 처단했던 대한독립단이 이 세 유형을 총살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걸 동아일보에서 본 친일파들은 크게 위축됐을 겁니다.
이완용 저격을 알린 1909년 12월 23일자 대한민보 기사. 동아일보는 15년 뒤인 1924년 11월 18일자에 이 대한민보 지면을 그대로 전재했다.
당시 이재명 이동수 등의 이완용 암살 기도를 충실하게 보도한 신문은 항일 민족지 대한민보였습니다. 창간 전이었던 동아일보는 파격적으로 이완용 저격을 다룬 대한민보를 그 제호와 함께 1924년 11월 18일부터 나흘 연속 전재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이듬해에는 이동수 공판을 앞두고 1910년 4월 대한민보에 실린 이재명 공판기를 지면에 연재했죠.
이재명과 함께 이완용 암살을 도모했던 독립운동가 이동수. 15년 동안 피신생활을 했으나 1924년 검거됐다.
1925년 2월 12일 이동수 공판이 열린 경성지방법원 앞 방청객의 행렬. 그러나 일본인 재판장은 공안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방청을 금지했다.
- 통의부는 뭐하는 것이냐.
- 군사조직은 뭘 하려고? 누구와 싸우겠다는 것인가.
“독립전쟁을 하려는 것이다. ○○(일본)하고 싸우지요.”
- 정갑주는 왜 죽였는가.
“그놈이 우리 동지를 잡아 일본사람에게 준 일이 있으므로 죽였다.”
원문
『三砲殺(삼포살)』을 宣傳(선전)
대한독립단원이 일졔히
총독부에서 이번에 시정선뎐(施政宣傳‧시정선전)을 함은 이미 다 아는 바어니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대한독립단)은 당국에서 시정을 선뎐한다는 말을 듯고 사월 일일 이래로 삼포살(三砲殺‧삼포살)을 일제히 선뎐하얏다는대, 그 방법은 여섯 명식 한 떼를 지어 중국 륙군의 옷을 입고, 말을 타고, 긴 창을 가지고 다니며 다음에 긔록함에 상당한 자를 포살하리라고 하얏다더라.
▲ 뎍의 견마가 되야 동포의 피를 빠는 자를 포살하라.
▲ 무긔를 뎨공하고 뎍에게 귀순하야 뎍과 통래하는 자는 포살하라.
▲ 일본의 학교를 경영하고, 아해와 청년으로 하야금 뎍에게 접근케 하는 자를 포살하라.
현대문
‘세 가지 총살 대상’을 널리 알림
대한독립단원이 일제히
총독부에서 이번에 시정을 널리 알린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대한독립단은 당국에서 시정을 선전한다는 말을 듣고 4월 1일 이래 ‘총살 대상 세 가지 유형’을 일제히 선전했다는데, 그 방법은 6명씩 한 무리를 지어 중국 육군의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긴 창을 가지고 다니며 다음 기록에 상당한 자를 잡아 죽이리라고 했다 한다.
▲ 적의 견마(犬馬)가 되어 동포의 피를 빠는 자를 총살하라.
▲ 무기를 제공하고 적에게 귀순해 적과 내통하는 자는 총살하라.
▲ 일본 학교를 운영하고, 아이와 청년으로 하여금 적에게 접근하도록 하는 자를 총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