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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필리핀에서 벌어진 한국인 사업가 청부살인 사건의 용의자들이 사건 발생 4년 만에 붙잡혀 현재 우리나라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4년 만에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범인들은 처벌을 받는 절차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진행된 실제 재판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다.
◇ “Who is Mr. Park?”…앙헬레스시티에서 벌어진 ‘청부살인’
“Who is Mr. Park?”(미스터 박이 누구냐?). 그의 물음에 박씨가 자신이라고 대답하자 갑작스러운 총격이 시작됐다. 목과 옆구리에 5발의 총을 맞은 박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킬러에게 살인을 교사한 장본인은 필리핀 현지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권모씨(55)와 박씨가 운영하는 호텔 투자자 김모씨(56)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씨는 당시 박씨가 운영하는 호텔에 5억원을 투자했는데 박씨가 투자 초기에는 자신에게 깍듯했으나, 투자 이후 자신을 홀대하고 투자금과 관련해 모욕적인 언사를 해 박씨를 살해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친하게 지내던, 당시 식당을 운영했던 권씨에게 “킬러를 구해주면 호텔식당 운영권을 주거나 5억원을 주겠다”고 하면서 살인을 의뢰한 것으로 드러났다.
권씨는 이후에도 A씨를 만나 “박씨를 살해하면 400만 페소(약 1억원)을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킬러는 청부살인을 결심하게 됐고, A씨는 권씨에게 “킬러가 내일 박씨를 살해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권씨는 또 이 말을 김씨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청부살인이 만연했던 필리핀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킬러를 특정할 수 없어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은 우리 경찰의 끈질긴 노력 끝에 살인교사범들을 특정하면서 진상이 서서히 드러났다. 결국 4년여만인 지난 1월 한국으로 귀국하던 권씨를 체포했고, 당시 한국에 있던 김씨와 함께 두 사람을 한국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 3개월 간의 재판, 3명의 증인…혐의 부인하는 피고인
권씨와 김씨 모두 구속돼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 3월17일 첫 공판준비기일 이후 4번의 공판준비기일, 2번의 공판기일을 진행했다. 지금까지 나온 증인은 모두 3명이다.
지난 1일 공판준비기일을 마치고 열린 첫 공판기일. 권씨의 조카 이모씨가 재판 첫 증인으로 나왔다.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면서 사업을 하고 있는 이씨는 권씨의 이종 조카이고, 김씨와는 권씨 소개로 알게 돼 김씨에게 사업투자를 받기도 한 사이다.
이날 이씨는 권씨와의 통화 중 권씨가 “김씨가 박씨를 죽이려고 킬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고 장사나 똑바로 하라”며 핀잔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권씨가 박씨가 사망한 당일 전화해 박씨 사망 사실을 전하면서 ‘김씨와 통화가 안된다. 돈을 받아야 하는데 (한국에 있는) 너가 좀 알아봐라’라는 부탁을 들었다고도 했다.
이모의 부탁으로 김씨에게 연락을 한 이씨는 김씨를 만났는데, 권씨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씨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도 일단 권씨가 죽네 사네하니 이씨가 자신에게 빚진 돈 2500만원을 권씨에게 보내주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도 솔직히 (두 사람이 그랬다는 걸) 믿지도 않는다”며 A씨에 대해서도 “엄청 순한 사람이다. 남에게 굳이 막 뭘 뜯어내거나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라고 했다.
◇ ‘사건의 핵심단서’의 증거능력, 재판 변수로 등장
지난 16일 2회 공판기일에서는 사건을 담당했던 두 명의 경찰이 증인으로 나왔다. 특히 이날 첫 번째 증인으로 나온 신용호 경사는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에 근무하면서 이 사건 수사에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신 경사는 이날 재판에서 사건의 중요한 단서의 내용과, 권씨의 진술, 입수한 첩보, 지급된 돈의 흐름 등을 종합해 김씨와 권씨를 청부살인 용의자로 특정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중요 단서로 토대로 작성된 수사보고서만 증거로 제출됐을 뿐, 단서 자체가 증거로 제출되지 않았다. 해당 단서가 증거로 제출되면 피고인들도 해당 파일을 열람할 수 있어 제보자의 신원이 노출돼 살해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재판부는 “제일 결정적인 게 중요 단서인 것으로 오늘 증인신문을 통해 확인됐는데, 증거로 제출하실 상황은 전혀 아닌가”라고 검찰에 물었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해당 단서를 보게 될 경우 당시 상황을 짐작해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다”며 향후 재판 상황에 따라 제출 여부를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권씨 변호인은 “해당 단서는 위법”이라며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향후 검찰이 이 단서가 증거로 제출할지, 재판부가 해당 단서를 토대로 작성된 수사보고서의 증거능력을 어디까지 볼지 등이 재판 변수로 등장했다.
◇엇갈린 한국과 필리핀의 수사결과…‘건맨’은 누구?
우리 수사기관은 권씨와 김씨를 박씨 살인청부를 교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만, 필리핀과 우리 수사기관의 결과와 다른 것이 증인신문 과정에서 드러났다.
신 경사 증언에 따르면 필리핀 수사당국은 권씨와 김씨, A씨가 아닌, 유모씨와 현지인 킬러 2~3명을 용의선상에 올려놨었다. 필리핀 수사당국은 현재 한국에 있는 유씨에 대해 이 사건 용의자로 체포영장을 발부하기까지 했다. 유씨도 박씨가 운영하던 호텔과 관련된 사람으로 유족과 호텔 관련자들과 법적 분쟁 중이고, 유족으로부터 필리핀에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 경사는 “유족을 조사했는데 유족은 ‘필리핀 경찰에서 작성한 고소장에 서명만 했다. 내용을 모른다’고 한 점을 종합했을 때 유씨를 용의선상에 올리기에 부족했다”고 강조했다.
또 C라는 킬러가 현장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쳤다고 한 유씨의 고소장에서 들어있는 현지 목격자의 진술이 우리 수사기관이 확인한 내용과 크게 차이를 보였다고 했다. 신 경사는 “범행 당시 CCTV 영상에는 킬러가 하얀색 SUV를 타고 도주했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수사당국은 또 D라는 필리핀 현지인을 용의선상에 올려 수사를 진행했지만, D의 범행 당시 알리바이가 드러나 결국 단순 무기 소지죄로만 재판에 넘겨졌다. 신 경사는 “C와 D 모두 진범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씨 변호인이 “필리핀 수사기관에서 (유씨를) 기소한다고 하면 범죄 혐의가 상당한 것 아닌가”라며 체포영장까지 발부된 유씨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한 것이 맞냐고 물었다.
이에 신 경사는 “필리핀 사법체계를 신뢰할 수 없다는 건 아닌데, ‘셋업 사건’(형사사건을 만들어 현지 사법당국에 체포되게 만든 후 이를 봐주겠다고 접근해 금품을 갈취하는 수법의 범행)으로 억울한 피해를 입은 경우가 있어 아무래도 우리 수사기관과 법원이 비해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우리와 필리핀 수사당국 모두 총을 쏜 킬러 ‘건맨’을 특정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건맨’ 안 잡혔는데 살인교사 성립하나”
이날 재판에서 변호인들은 ‘건맨’이 잡히기는커녕 특정조차 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사범이 성립될 수 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권씨 변호인은 “교사범이 자백을 하는 경우 교사범부터 처벌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수사보고서에서도 한국인 목격자가 총을 쏜 인물이 한국인으로 추정된다고 진술한 게 있고, 어느 필리핀 목격자는 D가 킬러라고 맞다고 돼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범이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범죄를 자백하지 않는 한 (교사범부터) 거꾸로 갈 수는 없다”며 “진범부터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강조했다.
김씨 변호인도 “최종적으로 교사범의 교사 의지가 정범에게 도달해 정범으로 하여금 결심을 하게 해아 한다”며 “정범(킬러)를 특정하지 않으면 범행을 수락했다는 증거가 없지 않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신 경사는 “그 부분은 법원이 최종적 법적 판단을 해야 할 거 같다. 제가 할 것이 아닌 거 같다”고 했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