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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흔드는 법안 봇물… 재계 “규제 안 늘려도 투명성 가능”[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0-06-22 03:00:00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논란 증폭




정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공정경제’를 위한 칼을 다시 빼들었다. 상법, 공정거래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 등 공정경제 법안이 최근 입법 예고된 상태다.

정부 여당이 보는 공정경제는 뭘까. 큰 틀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공약으로 내세운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혁을 통한 투명한 경영구조 확립’ 및 ‘재벌의 확장 방지와 경제력 집중 완화’로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20대 국회에서도 상법 및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야당의 반대와 ‘식물국회’ 상태가 이어지며 국회 통과가 요원해졌다.

그런데 4·15총선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의석수 177석(현 176석)을 차지한 ‘슈퍼 여당’은 국회에서 원하는 법안을 밀어붙일 힘을 갖추게 됐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21대 국회에서 공정경제 입법을 완성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달 11일 법무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각각 대주주의 경영권 행사를 제한하는 상법 개정안과 대기업 감시와 규제를 강화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정부 여당은 이 법안들을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이 목표다.

재계는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산업계가 마비될 지경인데 정부가 기업 활동을 제약하러 나섰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공정경제의 이면은 결국 ‘재벌 길들이기’라는 것이다.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무엇 때문에 정부 여당은 “21대 국회에서 꼭 통과시켜야 할 법”으로 공언하고, 재계는 “막아야 할 법”이라며 반발하는 것일까.

○ 상법 개정안… 대주주 영향력 줄이고, 일반주주 높이고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상법 개정안은 대주주 입김을 줄이고 소액주주의 권한을 확대하는 게 골자다. 일반 주주들에게 힘을 실어 총수 일가나 경영진을 견제해야 한다는 취지다.

주요 내용은 감사위원 분리 선임 및 의결권 3% 제한과 다중대표소송 도입이다. 이사회 일원인 감사위원은 △회사 영업에 관한 보고 및 조사권 △각종 서류 및 회계 장부 요구권 △경영 판단에 대한 타당성 감사권 △이사회 및 주주총회 소집 청구권 등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현행 상법에선 대주주 의결권 제한 없이 이사들을 먼저 선임한 다음, 뽑힌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감사위원 후보들이 대주주 의사에 부합하는 이사들이라 의결권 제한만으론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일었다.

그래서 개정안은 아예 이사와 감사위원은 분리해 뽑고, 최대주주 의결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특수관계인을 모두 합해 총 3%로 일괄 제한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의 최대주주인 지주회사가 30%, 총수인 회장 10%, 회장의 장남 4%라 치자. 이들이 이 기업의 감사위원을 뽑을 때 던질 수 있는 총 의결권은 44%가 아닌 3%다. 반면 A펀드, B펀드, C연기금이 한마음으로 뭉치기로 했다면 각 3%씩 총 9%를 던질 수 있게 된다. 펀드 연합이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을 가볍게 이긴다. 재계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해외 투기자본의 ‘지분 쪼개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2004년 SK와 경영권 분쟁을 벌인 소버린은 보유 주식 14.99%를 5개의 자회사 펀드로 분산시킨 예가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이미 감사위원의 3분의 2 이상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도록 하는 등 독립성 확보를 위한 조치는 마련돼 있다”며 “급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경영권 방어의 어려움을 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주총회에서 굳이 한 명만 분리선임하는 것은 법안 통과를 위한 ‘타협의 산물’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감사위원은 상법상 이사회 밑으로 들어가게 돼 있어 이사로 뽑힌 다음 감사위원이 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별도로 감사위원에 뽑힌 사람이 이사회 산하에 들어가는 것이 법리적으로 맞는지 의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재계는 또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한 다중대표소송제도 투기자본의 경영 간섭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입법 예고안에 따르면 상장회사의 경우 발행주식 총수의 1만분의 1(비상장사는 100분의 1)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SK그룹의 지주사인 ㈜SK를 예로 들면, 투기 세력들이 시가총액 20조6156억 원(19일 기준)의 0.01%인 20억6156만 원어치만 합쳐서 보유하고 있으면 ㈜SK가 50% 이상 지분을 보유한 SK E&S, SK실트론 등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특히 한국의 금융시장은 외국인 지분이 많아 해외 투기세력의 전횡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30대 기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감사위원 분리 선출 시 외국 기관 연합의 지분이 연기금을 포함한 국내 기관투자가를 합한 것보다 큰 경우는 19개 기업에 달했다. 실제 2000년대 이후 한국 기업들은 소버린, 헤르메스, 칼 아이컨 등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경영권 방어에 경영자원을 쏟아야 했다. 재계에서는 소액주주 보호 조항이 늘어난 것만큼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등 선진국에 보편화된 경영권 방어 수단도 높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 재계 “‘대기업=문제 집단’ 프레임 언제까지”
상법 개정안이 대주주의 권한을 약화시킨다면,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대기업 활동의 감시 감독이 강해진다는 측면이 있다.

전속고발권 폐지가 그렇다. 전속고발권이 폐지될 경우 누구나 공정거래 사건에 대해 고발이 가능해진다. 공정위 고발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중소기업이 억울함을 직접 고발해 풀도록 한다는 취지다.

4대 그룹 관계자는 “취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고발 남발로 광범위한 수사가 이뤄지고 수사가 다른 분야로까지 확대되면 정상적인 기업 경영이 어려워질 뿐 아니라 기업 이미지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며 “결국 대기업은 ‘갑질의 온상’, ‘문제 집단’으로 보고 규제를 확대하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이른바 일감 몰아주기 규제로 불리는 사익편취 규제 대상도 확대된다. 현재 총수 일가 지분이 상장회사 30% 이상, 비상장회사 20% 이상인 기업이 대상이라면 개정안은 20%로 일원화했다. 상당수 기업은 총수 지분 매각 등 지분 정리에 나서야 한다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공정거래법은 대기업집단 내에서 규제 대상 계열사와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가 이뤄질 경우를 사익 편취 행위로 보는데, 재계는 해당 조건이 모호해 규제 대상에서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규제 유형에 대한 모호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규제 적용 대상만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뿐 아니라 기존 법상 과도한 형별 규정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최승재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연구원장(변호사)은 “담합에 대해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며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도 과감히 삭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규제의 운용의 미를 살리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주진열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징역형’이 담합을 억제할 수 있는 효과가 크기 때문에 검찰과 공정위가 잘 조율해 나간다면 전속고발권 폐지는 괜찮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규제 없어도 사회 분위기가 기업 투명성 만들어
“어느 때보다 강력해진 국민연금의 권한을 쥐고 정부가 사기업의 경영까지 좌지우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업 가치를 훼손하는 행태에 대해서는 시장이 평가할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최근 ‘공정경제 법안’들이 모두 대주주의 권한을 법적으로 제한하거나 계열사들과의 출자나 거래를 사전적으로 규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 이렇게 우려를 표했다.

재벌 개혁의 시작점을 1986년 공정거래법 개정안으로 본다면 그 역사는 30년이 넘었다. 시작은 ‘한강의 기적’을 거치며 특정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면서 공정한 경쟁이 어려워진다는 이유에서였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으면서는 불투명하고 비효율적인 대기업의 지배구조가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일부 총수 일가의 편법적인 상속과 일감 몰아주기 등이 재벌 개혁의 명분으로 자리 잡으며 현재에 이르렀다. 자율성을 침해하는 사전적 규제가 아닌 주주대표소송 등 사후적 제도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하상우 한국경영자총협회 경제조사본부장은 “기업들도 과거 잘못된 관행을 해소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며 “현재 법 제도와 시민단체 등 사회적 감시 수준을 고려하면 부작용이 우려되는 규제를 굳이 도입하지 않더라도 기업들이 경영 투명성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동준 hungry@donga.com·지민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