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백자 동화매국문 병’, 46년 만에 국보 지정 해제…왜?

입력 | 2020-06-23 10:55:00


그동안 국보로서 위상과 가치 재검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온 국보 제168호 ‘백자 동화매국문(銅畵梅菊文) 병’이 국보의 지위를 내려놓았다. 국보로 지정된지 46년 만으로, 국가지정문화재의 국보 지정 해제는 이번이 세 번째다.

문화재청은 ▲출토지나 유래가 우리나라와 연관성이 불분명한 점 ▲같은 종류의 도자기가 중국에 상당수 남아 있어 희소성이 떨어지는 점 ▲작품의 수준 역시 우리나라 도자사에 영향을 끼쳤을 만큼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며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국보 해제를 최종 결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작품은 당초 ‘진사(산화동 안료로 그림을 그린 기법)를 사용한 조선 전기의 드문 작품으로 화려한 문양과 안정된 기형(생김새)이 돋보인다’는 이유로 1974년 7월4일 국보로 지정됐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이 백자는 일본인 골동품상 아마쓰 모타로에게 300엔을 주고 구매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높이는 21.4㎝, 입 지름은 4.9㎝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 전기 백자에 이처럼 동화(산화동)를 안료로 사용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최근까지 확인된 유물과 연구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는 백자에 동화로 장식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국보 지정 당시에는 기형 등을 바탕으로 해당 작품이 조선 전기인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했지만 기형과 크기, 기법, 문양과 유사한 사례가 중국에서 ‘유리홍(釉裏紅)’이라는 원나라 도자기 이름으로 다수 현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학계에서는 이 작품이 조선시대가 아닌 중국 원나라 때인 14세기경 작품으로 판단하고 있다.

희소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지정 해제 사유로 제기됐다. 현행 문화재보호법 지정 기준에서는 외국문화재라 해도 우리나라 문화사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있도록 돼있다.

하지만 백자 동화매국문 병은 출토지나 유래가 우리나라와 연관성이 불문명하고 같은 종류의 도자기가 중국에 상당수 남아 있어 희소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작품의 수준 역시 우리나라 도자사에 영향을 끼쳤을 만큼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도 고려됐다.

앞서 거북선에 장착된 화기로 알려졌으나 1996년 가짜로 판명됐던 ‘귀함별황자총통’이 국보 제274호에서 해제됐고, 국보 제278호 ‘이형 좌명원종공신녹권 및 함’는 2010년 한 단계 아래인 보물로 강등됐다.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면 해당 지정번호는 영구결번 처리된다.

한편 문화재청은 조선 17세기 불교조각 조성에 큰 자취를 남긴 조각승 현진(玄眞)의 가장 이른 작품인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보물 제2066호로 지정했다. 15세기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보물 제2067호로 각각 지정됐다.

현진(玄眞) 17세기 불교 조각사를 대표하는 조각승이다.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소실된 불상 조성을 주도했고, 1622년 광해군비 유씨가 발원한 자수사와 인수사의 11존 불상 제작을 지휘하는 등 왕실과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뛰어난 조각가다.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그의 활동 지역과 작품 세계, 제작 기법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예술 가치가 뛰어나다. 1741년(영조 17년)과 1755년(영조 31년)에 작성된 중수발원문(건축물을 보수하고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내용을 적은 글)을 통해 개금(불상에 금칠을 다시 함)과 중수(보수)한 내력, 참여 화승(畵僧)들의 명단과 역할을 알 수 있어 그 의미가 크다.

문화재청은 이러한 이유로 이 불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대좌(불상을 올려놓는 대)와 함께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보물 제2066호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가 약 208cm에 달하는 대형 불상이다. 현진이 1607년(선조 40년) 주도했고 휴일, 문습이 함께 참여해 완성됐다.

불상의 대좌 밑 묵서(먹으로 쓴 글)에 의하면, 백양사 불상은 왕실의 선조들인 선왕과 선후의 명복을 빌고 성불을 기원하며 만든 것이다. 1607년이라는 제작시기로 미루어 볼 때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등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지나지 않은 1610년 전후로 이루어진 불교 복구 과정 중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대한 규모에 긴 허리, 원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 신체의 굴곡에 따라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 주름, 안정된 자태 등에서 초창기 작품임에도 현진의 뛰어난 조각 실력과 더불어 17세기 불교조각의 새로운 경향을 선도한 시대적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자연스런 신체표현이 가능했던 것은 목조와 소조 기법을 조합해 만든 제작 방식 덕분이다.

일반적으로 목조불상을 만들 때는 나무를 쪼아 전체적인 형체를 만든 후, 좀 더 입체적이거나 현실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부분적으로 진흙 등을 사용한 소조 기법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백양사 불상 역시 주된 재질은 목조지만 진흙으로 보강한 사실이 과학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번에 같이 지정된 보물 제2067호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선 전기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다. 남장사 내 부속사찰인 관음선원에 모셔져 있다. 이 관음보살좌상 뒤에는 보물 제923호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이 놓여 있어 가치와 화려함을 더한다.


귀족풍의 단정한 얼굴과 어깨와 배에 멋스럽게 잡힌 옷 주름, 팔꿈치에 표현된 ‘?’형 주름, 무릎 앞에 펼쳐진 부채꼴 주름 등 15세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15세기 불상이 지극히 드문 상황 속에서 남장사 관음보살좌상은 이 시기 불교조각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또 관련 기록을 통해 1819년 인근 천주산 상련암에서 남장사 관음선원으로 이전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위와 개금과 중수 등 보수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불상의 역사성 또한 인정된다.

다만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의 경우 조성발원문 등 관련 기록이 부족해 정확한 제작 시기는 확정할 수 없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