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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과 끝 만남[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입력 | 2020-06-24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첫 만남은 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첫 만남은 만나는 시점 훨씬 이전부터 진행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모습은 어떠할까, 성격은? 내가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호감을 느낄까, 그 사람이 나를 편안하게 생각할까? 만나기 전부터 생각이 떠오릅니다.

정신분석을 받으려고 약속을 잡은 미래의 피분석자를 처음 만나는 과정은 일상의 첫 만남과 좀 다릅니다. 가슴이 뛰기보다는 어떤 문제로 찾아오는지, 감당할 만한 문제인지 긴장됩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합니다. 첫 만남의 모습에는 숨어 있는 희망과 기대, 드러난 불안과 긴장이 섞여 있습니다. 미래의 피분석자는 분석가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찾아옵니다. 삶에서 자신이 겪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거나 반신반의하며 들어옵니다.

첫 만남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일까요? 제대로 된 분석은 분석가의 확신과 자신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모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피분석자 자신도 모르는 마음의 흐름을 분석가가 어떻게 단숨에 알아챌 수 있을까요? 첫 만남에서 희망과 낙관을 쉽게 이야기하는 분석가는 분석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던져지는, 멋있게 들리는 해석은 미처 익지 않은 과일을 맛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분석을 지탱하는 단단한 기반은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알아보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첫 만남에서는 섣부른 해석보다 초면의 사람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말로 옮겨 표현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막연히 느끼는 힘든 감정도 말로 자세히 표현하면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말이 나를, 내 생각을, 내 감정을 느끼고 파악하게 합니다. 분석의 도구는 말입니다.

두 사람이 공간과 시간을 함께 쓰며 느끼는 감정은 미묘하게 흘러갑니다.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 만남의 첫 경험이 그렇게 이루어진다면 마음이 변화하는 시발점이 됩니다. 분석가는 자기 과시가 아닌,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여야 피분석자의 마음에 희망과 변화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첫 시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덮으려고만 한다면 분석을 안 받겠다는, 분석을 안 하겠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첫 시간에 꼭 할 일은 첫 만남의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입장을 잘 세우는 겁니다.

첫 만남은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저는 동료 의사가 내린 진단을 믿지만 덮어놓고 믿지는 않습니다. 의뢰서가 있어도 미리 읽지 않고 첫 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참조합니다. 분석을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첫 만남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의, 사람과 사람만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직업, 가족, 배경 모두 선입견이므로 참된 이해를 방해합니다.

어떤 관계이든 언젠가는 끊어집니다. 종결 시점에서 분석이 맺은 열매는 무엇일까요? 첫째, 피분석자 스스로 자신을 분석할 수 있는 자기분석 능력입니다.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므로 한정된 기간에 이루어지는 분석이 삶 전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알던 뉴욕의 한 분석가는 독특하게도 분석을 종결하는 마지막 시간을 평소보다 약간 일찍 끝내곤 했습니다.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는 것을 차단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둘째, 기존에 분석의 대상이 되었던 문제들을 개인사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분석의 결과로 그것들을 새로운 해석으로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분석의 효과를 제대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 분석은 개인사의 삭제가 아니고 개정 작업입니다. 삶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고 익히는 일입니다.

여러 해에 걸친 분석이 끝나면 분석가의 모습과 말이 피분석자의 마음에서 영영 사라질까요?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떤 식으로든지 남습니다. 대상관계 이론으로는 ‘대상 표상(表象)’으로 남고, 자기 심리학 이론으로는 ‘자기대상’으로 남아 삶이 힘든 순간에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종결 전은 물론이고 종결 후에도 피분석자와 분석가가 비분석적 관계를 맺는 것은 분석 윤리의 위반이자 금기로 간주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두 사람 사이에 애정 관계가 생기는 겁니다.

첫 만남은 끝 만남의 출발점입니다. 헤어짐을 전제로 시작되기에 분석가에게 피분석자는 하고 싶은 말(예: 자유연상)과 표현하고 싶은 감정(예: 부정적인 전이)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겁니다. 역설적으로, 분석이 결국 종결된다는 전제는 분석에서 부딪치는 부담스러운 관계와 과정을 두 사람 모두에게 자유롭게 합니다. 언어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오래전 경험을 돌이켜보면 외국인 분석가에게 외국에서 받은 분석은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서로 다시 볼 일이 없기에 낯 뜨거운 이야기도 풀어낼 수 있었으니까요. 국내에서 할 일을 다 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분석을 받게 되었지만, 어차피 얼굴 보면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은 다루어야 할 분석 주제입니다. 다행히 분석의 힘으로 다루지 못할 주제는 없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