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턴은 한반도 훼방꾼”이라는 靑 북핵 폐기 없는 終戰선언보다 북-미 회담 결렬이 국민에 유리했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北에 절절 매는가
김순덕 대기자
소련은 중국 아닌 중공의 대표권을 인정하라며 안보리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소련 붕괴 뒤 미국서 번역된 안드레이 그로미코 전 외교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안보리 불참은 스탈린 지시다. 미국이 대륙을 정복한 중공과 한반도에서 싸우게 하는 게 스탈린의 세계전략이었다. 미국을 아시아에 묶어둠으로써 소련은 유럽 사회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고, 중국의 기세도 꺾을 수 있어 전략적 이익이라는 거다.
이번엔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출신 존 볼턴이 우리나라를 구한 것 같다. 때맞춰 나온 그의 회고록을 놓고 청와대는 “볼턴이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고 비판했다. 볼턴이 북핵 협상 실패를 꾀했다며 불쾌한 모양이다.
2018년 3월 트럼프에게 김정은의 초청장을 전달했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회고록 상당 부분이 사실 왜곡이라고 했다. 그가 불타는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북-미 회담의 물꼬를 튼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볼턴은 “나중에 정의용은 김정은에게 트럼프를 초청하라고 처음부터 제안한 사람이 자기라고 거의 인정했다!”고 회고록에서 지적했다.
정의용이 이것도 부인한다면 볼턴의 양식과 지성을 모욕하는 일이다. 메모광에 가까운 볼턴이 맨 뒤에 각주까지 붙여 “정상회담 뒤 서울에서 가십이 나돌기에 나도 의심이 생겨 정의용에게 직접 이슈를 제기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회고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1년 안에 비핵화할 것을 요구해 동의를 받았고, 김정은은 비핵화 ‘뒤에’ 보상이 주어진다는 점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싱가포르 회담 뒤 실무협상에서 북한은 미국의 ‘강도적 비핵화 요구’를 비난하며 체제보장부터 해달라고 종주먹을 댔다. 볼턴의 눈에 “이 모든 외교적 판당고(스페인의 구애춤)는 한국의 창작물”로 보일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심지어 청와대가 희망적 사고에 사로잡혀 국민과 북-미 지도자를 북핵 해결의 환상으로 몰고 갔다면 문제의 차원이 달라진다. 북핵을 머리에 인 채 남북관계의 진전만으로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능하다고 믿을 순 없다. 소련과 중국의 승인을 얻어 남침만 하면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남한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은 70년 전 김일성의 모험주의와 다를 바 없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5월 ‘대(對)중국전략보고서’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공산당 총서기’로 호칭하며 과거 미소(美蘇)대결 같은 신냉전 시대를 선언했다. 소련이 사라졌을 뿐, 중국공산당은 냉전을 끝낸 적 없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미국이 공산당 독재체제가 ‘우리의 가치에 도전’한다며 우방들과 함께 체제경쟁 승리를 다짐한 것이다.
강대국 세계전략을 무시하고 우리끼리 산다는 건 이불 속 활갯짓이다. 북이 예고했던 대남 군사도발을 김정은이 어제 전격 보류한 것도 미국에서 항공모함과 B-52 전략폭격기들을 한반도에 전개한 영향이 컸다.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국가라고 할 수도 없다. 김일성 민족만의 전체주의 세습국가다. 더구나 핵무기를 생명줄로 아는 김정은 정권과는 통일도, 평화도 불가능하다. 문재인 정부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6·25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대한민국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김정은 정권한테 ‘겁먹은 개’ 소리나 들어야 한단 말인가.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