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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내년이 진짜 위기인 이유[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입력 | 2020-06-25 03:00:00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시작된 튀니지 반정부 시위는 ‘아랍의 봄’의 도화선이 됐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는 가난한 독재 국가들을 무너뜨렸다. 2011년 1월 튀니지 수도 튀니스 반정부 시위 모습.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강한 바람은 높은 파도를 만든다. 하지만 바람이 불자마자 파도가 일진 않는다. 일정한 시차를 두고 높아지고, 바람이 멈춘 뒤에도 오랫동안 사그라지지 않는다. 파도가 갑자기 높아지면 배들이 침몰한다. 작고 낡은 배가 먼저 뒤집힌다. 세계 주가 대폭락이라는 강풍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만든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흥미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주가 대폭락 1년 뒤쯤부터 허약한 독재국가들이 마치 태풍 만난 낡은 배처럼 뒤집어진 것이다.

21세기 들어 미국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가 대폭락이라 정의할 수 있는, 직전 고점 대비 35% 이상 하락한 사례는 세 번이다. 첫째는 2000년 1월 11,722.98을 기록했던 다우지수가 2002년 9월 7,591까지 하락했을 때다. 고점 대비 약 35% 빠졌다. 둘째는 2007년 10월 13,930을 찍었던 다우지수가 1년 4개월 뒤인 2009년 2월 7,062로 무려 49.5%나 떨어졌을 때다. 국제 금융 위기였다. 셋째는 올해 2월 13일 29,550을 기록했다가 40일 뒤인 3월 24일 18,576으로 고점 대비 약 37% 하락한 것이다.

이렇게 주가가 고점 대비 35% 이상 떨어지면 이듬해에 독재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무너졌다. 2003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는 미국의 침공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라크를 제외하고도 2003년부터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독재 정권들을 줄줄이 무너뜨린 ‘색깔 혁명’이 일어났다. 2003년 장미 혁명으로 그루지야(현 조지아)에서 11년 집권했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축출됐다. 2004년엔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2005년엔 튤립 혁명으로 키르기스스탄에서 15년간 장기 집권했던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각각 권좌에서 밀려났다.

2009년 주가 대폭락이 벌어졌던 이듬해인 2010년 튀니지에서는 아랍의 봄이 시작돼 제인 벤 알리가 쫓겨났다. 이어 리비아에서 무아마르 알 카다피,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예멘에서 알리 압둘라 살레, 알제리에서 압델 아지즈 부테플리카, 수단에서 오마르 알 바시르가 줄줄이 무너졌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도 붕괴 직전까지 갔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대공황 수준의 주가 폭락이 오면 시차를 두고 실물경제에 충격이 간다. 이 충격을 가장 크게 받는 국가들은 선진국이 아니라 경제가 허약한 독재국가들이다. 다우지수가 하락하면 미국이 최대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달러를 미국으로 뽑아가는 바람에 중남미,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가 더 큰 피해를 받는 이치를 떠올리면 된다. 가난한 청년의 분신이 도화선이 된 아랍의 봄처럼 붕괴된 독재국가들에선 경제 악화가 시위를 불렀다.

다우지수가 37% 이상 빠진 올해의 경우 엄청난 유동성에 힘입어 V자 반등에 성공한 듯 보이지만, 전 세계 실물경제는 이미 큰 타격을 입었다. 그렇다면 과거 사례에서 보듯이 이 충격이 내년부터 가장 허약한 독재국가들에 미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타격을 볼 가능성이 높은 독재국가로 이란과 북한, 투르크메니스탄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코로나와 원유 가격 하락으로 큰 피해를 본 이란이 가장 위험해 보인다. 북한 역시 강력한 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한 셀프 봉쇄로 급속히 허약해지고 있다. 명색이 국가인지라 내년까지는 충격을 버틴다고 해도 그 이후는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사례를 보면 소련이 멸망한 뒤 3, 4년 잘 버티다 1994년 하반기에 접어들며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과거 이명박 정부 시절 통일부에서 ‘북한정세지수’란 것을 개발했다. 아마 내년에 이 지수의 위기 점수가 가장 높을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들어 지금처럼 북한 내구력이 취약해졌거나 또 취약해질 것으로 예상된 적은 없다.

주가가 V자 반등에 성공해 내년까지 유지되면 김정은 체제는 훨씬 버티기 수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올가을에 팬데믹이 다시 시작된다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충격파는 올 2분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라는 배가 그런 충격에도 전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말하긴 쉬워도, 막상 현실화되면 무서운 시나리오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