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인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왼쪽 사진)과 주한미국대사관.
이기홍 논설실장
주한 미국대사관은 “잊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내걸었고, 그 옆 대한민국역사박물관(옛 문화체육관광부 청사)에는 “녹슨 철망을 거두고”라는 배너가 걸렸다.
“잊지 않습니다”는 희생을 추모하며 안보를 강조하는 느낌이, 역사박물관의 특별전 제목인 “녹슨 철망을 거두고”는 민족화합과 평화를 강조하는 느낌이 강하다. 나란히 걸린 두 배너를 보며 문구가 서로 바뀌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런데 과거 독재정권들이 안보로 치우쳤던 것 보다 더 큰 기울기로 문재인 정권은 민족화합으로 쏠려 있다.
예상대로 6·25 70주년을 권력주변 언론매체, 기관들은 조용히 넘어갔다. 미국 상·하원이 추모 결의안을 제출하고, 해외 참전국에선 참전용사들의 얼굴사진을 붙인 경전철이 달리는 등 대대적으로 기념한 것과 대조적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6·25 만큼 비극적인 사건이 또 있을까. 수백만 목숨을 앗아가고 1천만이 넘는 가족에 생이별을 강요한 비극적 사건을 갈수록 외면하는 이유는 6·25를 강조할수록 민족화합에 저해가 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민족은 이 정권 안보, 남북정책의 최우선 가치다. 그 뿌리에는 1980년대 운동권의 민족해방론(NL)이 자리잡고 있다.
민족을 절대 명제로 여기는 인식은 대북정책에도 관철됐고 때로 강박관념 수준이 돼 수많은 왜곡을 낳는다. 북한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내재적 관점으로 변호해 주고 비난을 덜어 주려다 보니 팩트 왜곡도 서슴지 않는다.
예를들어 최근 북한이 도발하자 여당 김두관 의원은 “북한이 왜 핵을 개발하게 되었나를 복기해 보자”며 “1994년 북-미간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면서 경수로 사업이 추진되었지만 부시 대통령이 중유공급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이를 빌미로 북한은 4차에 걸쳐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2002년 미 정보 당국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장비를 유럽 등에서 구입한 영수증 등을 입수했다. 한국 정부도 휴민트를 통해 북한의 HEU 개발 가능성 첩보를 입수했다. 미 국무부 켈리 차관보 일행이 10월 평양을 방문해 이를 추궁하자 강석주 외무성 1부상은 HEU 프로그램을 사실상 시인하는 발언을 했고 미국은 그해 12월 중유 공급을 중단했다.
북한은 “강석주는 HEU를 시인한 적이 없다”며 미국이 먼저 중유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그 후 핵개발을 재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압둘 아디르 칸 박사가 북한이 1990년대 후반부터 파키스탄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핵개발을 진행해온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제네바 합의를 어긴 것은 북한임이 명백해졌다.
하노이 담판 결렬 원인은 복잡한 설명을 다 생략하면 단 한가지다. 진정한 비핵화를 할 의지가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김정은이 답을 회피한 것이다. 실제로 김정은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旣) 보유 핵탄두와 핵물질을 포기하겠다는 의향을 밝힌 적이 없다.
정의용 실장과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에겐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과대포장하고, 김정은에겐 이미 고철이 된 영변만 포기해도 제재가 해제될 것처럼 과도한 기대를 심어준, 즉 매물 상태와 가격 조건을 속여서 매도인과 매수인을 중개업소까지 나오게 한 ‘부정직한 중개인’이었는지, 어려운 거래를 고군분투해서 만남으로까지 연결시켰으나 막바지에 ‘꼴통 매도인’ 때문에 거래를 놓친 성실한 중개인이었는지는, 청와대가 회고록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결론을 유보하자.
하지만 남동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열흘도 안 지나 우리 내부에서 “남과 북, 우리끼리” 주장이 봇물 터지는 현상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우리끼리’는 좋다. 그렇다면 비핵화는 어떻게 할 것인지 복안을 밝혀야 한다. ‘남북협력과 비핵화는 도저히 함께 이룰 수 없으므로 핵 문제는 통일 때까지 그냥 덮어두고 스킵하자’는 것이 속내라면 솔직히 털어놓고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요즘 집권세력은 내정에서 폭주를 거듭하고 있다. 국회 법사위를 장악하더니 정권실세들이 개입된 사건이면 진행 중인 재판이고 뭐고 아랑곳없이 사법부까지 불러 압박하고, 대학에 대통령 비판 대자보를 붙였다고 처벌하고…5공 때도 들어보지 못한 일들이 이어진다.
그런데도 내정의 폭주는 거여(巨與)가 된 덕분에 별 견제도 받지 않는다. 선거나 민심의 파도에 부딪힐 때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이다.
남북문제도 마찬가지로 독주 시동을 걸려 했는데 김여정 담화라는 예상 밖 돌부리에 걸렸다. 내정과 달리 안보는 상대가 있으므로 폭주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는 게 정상적인 반응일 텐데, 오히려 액셀을 밟을 태세다. 도발에 제재완화와 종전선언으로 화답하려는 움직임이 들끓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 반응이 거의 조건반사처럼 굳어진 것은 ‘민족’을 절대명제로 여기는 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은 물론 소중한 가치다. 하지만 민족을 지금도 외교안보의 최우선 과제라고 여긴다면 시대착오다.
외교안보는 미국, 북한, 국제사회라는 파트너가 있어 독주는 벽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과정 자체가 국가 전체에 소모적 피해와 낭비, 국론 분열을 가져올 테니 그것이 안타깝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