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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세계관의 형들을 찾아서[임희윤 기자의 죽기 전 멜로디]

입력 | 2020-06-26 03:00:00


“(신작 세계관의 바탕이 된 책을) 다 읽어보지 못했다. 유튜브와 블로그로 내용을 찾아봤다. 실은 회사에서 추천한 것(세계관)이다” 같은 변명은 형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랩소디의 ‘Symphony of Enchanted Lands II―The Dark Secret’(2004년·왼쪽)과 블라인드 가디언의 ‘Somewhere Far Beyond’(1992년) 표지.

임희윤 기자

요즘 아이돌 그룹들은 세계관 놀이에 흠뻑 빠져 있다. 학교 급훈 정도 되는 뻔한 메시지를 한껏 포장해 ‘뭔가 거대한 게 있는 것 같아. 덕질을 더 해봐야겠어’의 환각을 느끼게 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무리수에 가까워 보이는 과장된 콘셉트를 들이대는 경우도 있다.

그룹 ‘여자친구’의 ‘回: LABYRINTH’ ‘回: Song of the Sirens’처럼 한자를 활용한 앨범 제목마저 유행이다. 상형문자의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 글자에 입체적 의미를 담고, 인구가 많은 중화권에 호소하며, 서구 팬에게는 묘한 오리엔털리즘적 매력도 뽐낼 수 있다. 신인 그룹 ‘TOO’는 동양철학 아이돌이다. 올 초 오행(五行), 오방(五方), 오색(五色)의 세계관을 내세우며 데뷔했다. 데뷔작 제목은 ‘REASON FOR BEING: 인(仁)’.

#1. 26일 엠넷에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I-LAND(아이랜드)’가 시작된다. 세계관 만들기에 통달했다는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참여해 참가자들을 특설 건물에 몰아넣고 경쟁을 시키며 성장 서사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헝거 게임’ ‘메이즈 러너’ 같은 영화를 연상시키는데, 혹여나 영화처럼 청춘을 희생시키는 디스토피아를 보여줄까 봐 소름이 돋는다.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2. 세계관의 범람은 아이돌 그룹들이 얼마나 개성을 갖기 어려운 존재인지를 되레 증명한다. 세계관 놀이를 바라보다 진짜 세계관에 미쳤던 형들이 생각났다. 아는 형들은 아니고, 조금 윗세대 음악가 형님들이다. 또 ‘라테’ 이야기다. 이 형들은 세계관 구축을 알아서 한다. 수십 명의 A&R 팀 직원과 스토리 작가, 곡마다 붙은 10명 내외의 국내외 작사가 군단 같은 것들은 필요 없다. 그럴 돈도 없다.

#3. 재작년 핀란드에서 만난 메탈 그룹 ‘아모르피스’가 먼저 떠오른다. 핀란드 신화 ‘칼레발라’를 소재로 지금껏 10장 이상의 앨범을 만들었다. 우리 식으로 치면 단군신화에 미친 메탈 밴드인 셈. 약관의 청춘이던 초기 멤버들이 헬싱키와 스톡홀름을 잇는 염가 페리에 탔다가 객실에 놓인 칼레발라를 보고 “유레카!”를 외친 게 시작이다. 학자들도 진땀 뺀다는 서사시를 파고들어 직접 작사하고 곡을 만들어 세계 메탈계에서 조명을 받았다.

#4. 덴마크 록 가수 킹 다이아몬드(본명 킴 페테르센)도 걸물이다. 공포물 주인공처럼 화장하고 암흑의 서사시 같은 앨범을 만든다. 1777년 7월 7일에 일어난 가상의 사건을 테마로 1845년의 저주 받은 저택 이야기를 풀어낸 ‘Abigail’(1987년) 앨범으로 유명하다. 2002년에 속편 ‘Abigail II: The Revenge’를 냈다.

#5. 북유럽 신화, 바이킹 서사시를 테마로 삼은 수많은 북유럽 밴드들이 머릿속에 은하수처럼 명멸한다. ‘반지의 제왕’부터 스티븐 킹까지 파고들며 줄기차게 곡의 소재로 삼는 독일 밴드 ‘블라인드 가디언’은 밴드를 가장한 독서 모임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이탈리아 밴드 ‘랩소디 오브 파이어’(‘랩소디’의 후신)는 이길 수 없다. 리더 루카 투릴리가 직접 쓴 이른바 ‘엘가로드 연대기’ 하나로 밀고 나간다. 데뷔 앨범 ‘Legendary Tales’(1997년)부터 10집 ‘From Chaos To Eternity’(2011년)까지, 14년에 걸쳐 10장의 음반을 이 줄거리로 이어갔다. 불 뿜는 용과 신비의 검, 투사의 고뇌 이야기가 구구절절. 가히 음악판 ‘왕좌의 게임’ 시리즈다.

#6. 무식할 정도로 우직하게 나아가는 형들의, A급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돌직구 마라톤은 기묘한 미적 쾌락을 준다. 타이틀곡은 살짝 애매한 사랑 노래로 가는 상업적 타협도 별로 없다. 중세풍 악곡을 위해 바로크 리코더, 바이올린 연주를 덧대면서도 오케스트라 섭외할 돈은 아끼려 조악한 신시사이저 스트링으로 대체하는 형들의 편곡마저 귀엽다. 작사 작곡 편곡 연주부터 무대 연출과 분장, 세계관 구성과 실행까지 DIY로 하는 형들은 거의 ‘슈퍼 아이돌’ 수준이다.

#7. 웰메이드가 되지 못한 모든 실패한 청춘과 원 히트 원더(단 하나의 히트곡만 남긴 아티스트)를 응원한다. 성장 서사 따위는 없어도 좋다. 유아적 상상력에 머문 유치한 세계관이라도 진짜로 빠져드는 모습은 아름답다. 깡으로 승부하는 세계관 형들이 요즘 가끔 그립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