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한일 갈등에도 진화하는 일본 속 한류
일본 젊은층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의 달고나 커피. 인기에 힘입어 최근 도쿄 시부야에는 국내 한 달고나 커피 전문점이 진출해 매장을 냈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카페에서 만난 대학생 야마모토 아미 씨(22)는 자신을 7인조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팬이라고 밝혔다. 그는 “BTS 멤버들이 달고나 커피를 마시는 영상을 보고 이곳에 왔다. 일주일에 최소 3, 4번은 달고나 커피를 즐긴다”고 했다.
○ ‘긴급 사태’ 때 달고나 커피 마신 日 젊은층
이날 찾은 시부야 매장은 매장 내 공간이 없는 테이크아웃 전문점이다. 종업원도 단 1명.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새도 없이 출입문을 나서야 하지만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개장을 기다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도 달고나 커피의 인기에 한몫했다. 3월 28일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의 외출 자제 요청, 4월 6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긴급사태 발령 등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적잖은 젊은이들이 유튜브를 보며 달고나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2000년대 초 드라마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1차 한류, 2000년대 후반 K팝이 일으킨 2차 한류 등 과거와 달리 최근 한류는 문화 콘텐츠를 넘어 일본 젊은이들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라이프스타일 한류’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달고나 커피 외에도 치즈닭갈비, 치즈핫도그 등 K푸드가 각광받는 모습이 뚜렷하다. 권용석 히토쓰바시(一橋)대 교수는 “한류 붐이 일어난 지 20년 가까이 되다 보니 이제 한류가 새로운 현상이나 유행이 아니라 일본인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정착하는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 우익도 한드 애청… 지상파→넷플릭스로
일본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되지 않아도 한류 드라마는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 넷플릭스에서 ‘사랑의 불시착’ 등이 인기를 얻으며 또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사진은 넷플릭스 내 사랑의 불시착 페이지. 넷플릭스 캡처
‘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부 제도가 필요했다’ 등 각종 혐한(嫌韓) 발언으로 유명한 극우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51) 전 오사카 시장조차 팬을 자처했다. 그는 11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호기심에 1, 2회 정도 보려 했으나 한 번 보는 순간 16회까지 전편을 봤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랑 이야기는 물론이고 남북 관계 등 최근 화제가 되고 유행이 될 만한 요소가 다 있었다”고 호평했다.
일본에서는 이 드라마가 북한을 소재로 삼았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제작진이 북한 생활 실태와 사회적 관습에 대해 조사하는 등 철저한 고증을 기했다”고 평했다. 최근 북한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 한반도 긴장 상황이 높아진 후 아베 총리가 “적군의 미사일 기지 등을 타격할 수 있는 ‘적기지 공격 능력’ 확보를 위한 논의를 본격화하겠다”고 밝히는 등 일본 사회 전반에서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이 여전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일본 시청자가 한드를 소비하는 플랫폼이 지상파에서 넷플릭스로 바뀐 것 또한 한류 열풍에 일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겨울연가’가 대표하는 1차 한류가 공영방송 NHK에서 시작됐다면 지금은 넷플릭스라는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이 대세가 됐다는 의미다. 한드의 주 시청자도 지상파를 즐겨보는 중장년층에서 10, 20대로 대폭 낮아졌다.
황선혜 한국콘텐츠진흥원 일본비즈니스센터장은 “세계 각국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넷플릭스에서 한국드라마가 선전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콘텐츠의 작품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 대형 레코드점 한 층 전체가 K팝 매장
한일 관계가 악화됐지만 케이팝의 인기는 여전히 높다. 최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9인조 걸그룹 ‘트와이스’의 공연을 보러 온 일본 팬들이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24일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BTS, 트와이스, 엑소 등 국내 아이돌 그룹의 한국어, 일본어 발매 앨범이 가수별로 진열돼 있었다. 특히 트와이스의 미니 앨범 ‘모어 앤드 모어’ 등 한국 가수의 최신 한국어 앨범도 수입돼 마치 한국 음반점을 방불케 했다.
BTS가 2월 발표한 한국어 정규 4집 ‘맵 오브 더 솔: 7’은 상반기(1∼6월) 일본에서 42만9000장이 판매됐다. 일본 가수를 포함해 상반기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해외 가수가 상반기 앨범 판매량 1위를 기록한 것은 1984년 마이클 잭슨의 2집 ‘스릴러’ 이후 36년 만이다.
일본 음악계의 K팝 배우기 열풍도 뜨겁다. 3월 데뷔한 11인조 남성 아이돌 ‘JO1’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끈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 제작진이 일본에서 만든 그룹이다. JYP엔터테인먼트 역시 일본인으로 구성된 K팝 걸그룹을 만드는 ‘니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나바타 도시야(名畑俊哉) 오리콘 부사장은 “한국 가수들은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 이용도 일본 가수보다 활발하다. 이들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콘텐츠를 전달하며 일본 젊은층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일본 젊은층이 늘어나 한국어 강의 동영상도 덩달아 인기다. 그는 향후 K팝을 굳이 ‘K팝’이라 지칭하지 않아도 무방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범용 음악 콘텐츠가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 출판 한류도 열기
지난해 3월 일본에서 출간된 김수현 작가의 에세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는 2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역시 15만 부 이상 판매됐다. 한일 여성의 우정을 다룬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 등도 일본 출판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 문학을 해외로 수출하는 에이전시 KL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는 “한국 드라마와 가요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한국 출판물에 대한 친밀도도 증가했다”고 출판 한류의 배경을 설명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역시 BTS의 멤버 정국이 읽은 책으로 알려지면서 일본 젊은 독자들에게 큰 화제가 됐다. 김 작가의 신작 에세이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는 최근 2억2000만 원에 일본 출판사와 판권 계약을 맺었다. 일본에 수출된 국내 서적으로는 최고가다.
한국 문학에 대한 일본 독자들의 정서적 공감대도 출판 한류의 요인으로 꼽힌다. 지리적으로 인접했을 뿐 아니라 고령화, 저출산, 성차별, 교육 등 한국 문학에 등장하는 사회 문제에 일본 독자 역시 크게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다. ‘82년생 김지영’을 펴낸 지쿠마쇼보 출판사에 따르면 많은 일본 독자들이 “내 이야기라고 느꼈다” “일본인에게도 읽힐 책”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 과거보다 정치 영향도 덜 받아
2018년 11월 BTS의 한 멤버가 사석에서 원폭 사진이 담긴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TV아사히의 대표 음악 프로그램 ‘뮤직스테이션’ 측은 BTS의 생방송 출연 하루 전 일방적으로 취소를 통보했다. 같은 해 도쿄돔에서 열린 BTS 콘서트 때도 일부 우익이 “BTS 음악을 듣지 말라”고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이달 15일 극우 산케이신문 계열 방송인 후지TV를 시작으로 NHK 등 지상파 방송은 잇따라 BTS를 초빙하고 있다. TV도쿄는 다음 달 5일 BTS를 위한 1시간 특별 방송까지 편성했다.
일본 문화청 문화부장을 지낸 데라와키 겐(寺脇硏) 교토조형예술대 교수는 “양국 정부 사이가 나쁘다고 두 나라 국민의 문화 교류가 지장을 받는 시대는 지났다. 특히 한류를 적극 소비하는 젊은층이 정치와 문화를 구분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여론조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일본 내각부가 18세 이상 일본 성인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한국에 친근함을 느낀다”는 응답은 26.7%로 조사를 시작한 1978년 이후 42년 최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현재 한류 콘텐츠를 주로 소비하는 18∼29세의 45.7%는 “한국에 친근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일본 전체 평균과 약 20%포인트 차이가 났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김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