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사죄담화 발표한 무라야마 자기 정치생명 걸었지만 한국선 혹평 세월 흐른 뒤 ‘일본의 양심’ 재평가 일본 내 친한파는 한국의 소중한 자산 무턱댄 공격은 日 우익만 웃게 할 뿐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1990년 버블이 붕괴하자 자민당의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1993년에 비(非)자민당 연립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듬해 연립정권의 호소카와 총리가 사임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후임 총리마저 사임하자 정국은 혼란에 빠졌고, 자민당의 고노 총재는 사회당과의 연립정권을 추진하면서 무라야마에게 총리가 돼 국정을 이끌어 달라고 부탁한다. 1993년 자민당 정권의 관방장관으로 있으면서 위안부의 강제성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한 바로 그 고노 총재다. 무라야마는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에도, 총리 자리에도 뜻이 없었지만 고노 총재의 진심 어린 설득에 결국 제안을 수락했고 우여곡절 끝에 총리에 취임했다.
무라야마는 소수 정당의 위원장인 자신이 예상하지도 뜻하지도 않던 총리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역사적 소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취임 이듬해인 1995년은 종전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는 자민당과의 연립정권 합의사항에 “과거의 전쟁을 반성하는 결의를 행한다”는 항목을 포함시켰고, 그 결과 1995년 6월 중의원에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는 결의가 통과됐다. 그러나 의원 만장일치 채택을 바란 무라야마의 기대와는 달리 다수의 자민당 의원이 본회의에 출석하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무라야마는 내각(국무회의)의 만장일치 찬성으로 담화문을 발표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총리 자리를 걸고 담화문의 내각 결의를 추진했고, 무라야마의 단호한 의지를 알고 있던 자민당 출신 국무위원들은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총리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내각의 만장일치 결의문이었기 때문에 훗날 ‘무라야마 담화’로 불리게 되는 이 담화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됐고 이후의 모든 내각에 계승됐다.
그러나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된 25년 전에 그를 일본의 양심으로 높인 한국 기사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피상적 반성으로 폄하됐고, 무라야마의 주도하에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아시아여성기금이 발족되자 그는 일본 정부의 책임과 배상을 외면하는 파렴치한이 됐다. 그런데,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인하고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려는 세력이 정권을 잡자 갑자기 일본의 양심이 돼 한국 언론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무라야마는 그의 정치 생명을 걸고 무라야마 담화를 관철시켰다. 그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친필 서명의 사죄편지를 보낸 최초의 일본 총리이기도 하다. 식민지배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의 눈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을 테지만 소수당 출신 총리가 가지는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그의 입장을 우리는 왜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를 공격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우파들을 기쁘게 한 것이 실수는 아니었을까.
최근 각종 정치 스캔들에 경제마저 휘청거리자 아베 총리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머지않아 총리가 바뀔 것이다. 누가 후임 총리가 될지 알 수 없지만 후보자로 거론되는 인사 중에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분명히 하는 이도 있다. 지금의 일본 정권보다 더 양심적이고 한국에 대해 더 호의적인 정권이 등장한다면 대화를 통해 관계 개선의 여지를 찾아야 한다. 25년 전 무라야마에게 했듯이 부족한 점만 보고 질책하고 공격한다면 다만 일본 우익을 기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