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CVC’ 도입 추진 논란
기업 산하의 투자회사(펀드)를 의미하는 CVC는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혁신성장’이 핵심 경제 정책 키워드로 떠오르자 활성화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전통 제조업 중심의 경제 성장 전략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첨단 정보통신기술(ICT)로 무장한 스타트업·벤처기업 육성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다. CVC 제도는 미국 등 해외 주요국에선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지만, 현재 한국에선 지주회사 산하에는 CVC를 둘 수 없다.
경제계와 스타트업 업계가 3년간 다양한 경로로 CVC 관련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건의했지만 꿈쩍하지 않던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새로운 경제 활성화 대책 마련이 절실해지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달 11일 CVC 관련 규제를 일부 완화하는 개정안을 다음 달 내놓겠다고 밝힌 것이다. 반면 공정위는 “CVC를 지주사 산하에 두면 대기업의 사금고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며 외부 자금이 CVC에 들어올 수 없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 “CVC, 대기업과 혁신 기업의 상생 협력 모델”
벤처캐피털 본엔젤스가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에 2011년 3억 원을 투자한 뒤 지난해 말 독일 딜리버리히어로에 보유 지분을 약 3000억 원에 매각하기로 결정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본엔젤스의 투자 대박은 매우 이례적 사례로 꼽힌다. 벤처캐피털 업계에선 10개 기업에 투자해 8, 9곳은 실패하고 1, 2곳에서만 수익을 거둬도 성공한 거래로 보고 있다.
이처럼 스타트업·벤처기업 투자는 위험 부담이 높기 때문에 벤처캐피털은 연기금(국민연금), 국책은행(KDB산업은행), 보험사 등으로부터 나눠서 돈을 받아 펀드를 만든다. 펀드에 최대한 많은 자금을 모으되 실패에 따른 손실 부담을 분산하려는 취지다. 펀드를 수년간 운용한 뒤에는 청산해 투자자들에게 원금과 수익금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의무다. 재무적 측면에 집중해 투자를 진행하다 보니 스타트업·벤처기업의 성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원하고 기다려주긴 어려운 구조다.
반면 특정 기업 지주회사 산하의 CVC는 재무적인 성과보다는 자신들의 사업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따진다. 단기적으로는 투자 수익을 얻기 어려운 아이디어나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벤처기업이라도 장기적으로 사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자금은 물론이고 직접 경영 노하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지원할 수 있다.
벤처캐피털 TBT의 임정욱 대표는 “CVC는 대기업이 혁신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효율적인 제도”라며 “특히 상생 협력을 통한 바람직한 창업 생태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 공정위 “외부 자본 조달 제한”… 재계 “반쪽짜리 CVC”
대기업이 공정거래법의 금지 규정을 피해 지주회사가 아니라 일반 계열사 산하에 CVC를 설립해 운영하는 것은 가능하다. 삼성전자 등 6개 계열사가 공동 대주주로 있는 ‘삼성벤처투자’가 대표적이다.
다만 경제계와 스타트업 업계에선 지주회사가 아닌 일반 계열사에 CVC를 설립하는 구조가 크게 2가지 측면에서 한계점을 드러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우선 정부가 기업의 투명한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하며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장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주회사 산하에 CVC를 둘 수 없도록 한 정책이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실제 롯데는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고 2017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산하에 금융회사를 둘 수 없도록 한 공정거래법의 적용을 받게 됐다. 결국 CVC인 롯데엑셀러레이터는 계열사인 호텔롯데 산하로 옮겨야 했다. 이미 지주회사 체제를 갖춘 SK, LG 등은 CVC를 아예 미국에서 운영하고 있다.
정부는 재계와 스타트업 업계의 문제의식에 공감해 지주회사의 CVC 보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공정위가 제동을 걸었다. CVC가 모기업인 지주회사의 자금으로만 펀드를 운용하도록 조건을 달겠다는 것이다. 대기업 지주회사가 CVC를 활용해 기존에 보유하지 않은 사업 분야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계열사를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막겠다는 취지다. 공정위는 이러한 규제의 근거로 구글벤처스가 지주회사인 알파벳의 자금으로만 투자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구글벤처스는 흔치 않은 사례로 꼽힌다. 미국에서도 상당수 CVC가 다양한 자금이 함께 참여하는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경제계와 스타트업 업계는 CVC 펀드에 외부 자본 유입을 막으면 투자 심리가 위축되는 효과가 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미나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정책실장은 “펀드에 지주회사의 자금만 들어오도록 하면 반쪽짜리 CVC로 전락할 수 있다”며 “또 스타트업에 대한 특정 대기업의 입김만 세지는 부작용도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CVC 지분을 다른 기업이나 투자자가 함께 보유하도록 허용해야 투자에 따른 책임도 분산하고 펀드도 더 투명하게 관리,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CVC, 글로벌 트렌드…“금산분리 중심 규제 틀 벗어나야”
경제계는 금산분리 원칙의 시작을 1961년 군사정권이 기업이 보유한 은행 주식을 강제로 팔도록 한 조치로 보고 있다. 이후 금산분리 규제는 대기업이 자사 보유 금융사를 통해 마구잡이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도록 제한한다는 취지에서 지켜져 왔다. 공정위나 시민단체 등은 지주회사 산하에 CVC를 둬 외부자금을 받는 것이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해 총수 일가의 사업 확장 통로가 되거나 사금고로 활용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계는 과거 금산분리 규제가 도입될 때와 현재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국내 대기업이 자체 신용으로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CVC 등을 사금고처럼 활용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신영수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해서는 ‘금융산업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산업자본의 지분 보유 규제를 완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CVC에 대한 경계심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면서 “금산분리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와 분석을 통해 사전 규제를 최소화하는 형태로 개편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지민구 warum@donga.com·곽도영·허동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