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산업1부 차장
한 재계 관계자는 “당시 삼성도, SK도 전문경영인들이 복잡한 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양사 오너가 만나 ‘한국 휴대전화 생태계’라는 큰 그림으로 접근하니 일사천리로 양사의 중장기 스마트폰 미래 전략이 세워졌다”고 회상하며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평했다.
최근에도 기업 총수들의 만남이 주목을 받고 있다. 무대는 자동차시장으로 옮겨졌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동력이 내연기관에서 전기로 바뀌는, 그야말로 100년 만의 변화가 시장을 흔들자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을 중심으로 4대 그룹 총수가 연달아 회동에 나선 것이다. 사실상 격변의 시기마다 총수 차원의 논의가 있었던 셈이다.
총수는 능력이 뛰어나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신화 같은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기업은 100여 년 동안 진화를 거듭하며 살아남는 동안 시장의 격변기마다 카리스마적 리더인 총수의 의사 결정에 기대어 도약해 왔다. 총수 중심의 중장기 의사 결정이 우리 기업의 시스템으로 고착된 것이다. 인텔의 비웃음 속에 1982년 삼성이 반도체시장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나, 1993년 SK가 신약 개발에 뛰어들어 27년 후인 지금에야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나 기업사에 남을 만한 사건 뒤에는 누군가의 결단이 있었다. 후발주자였던 한국 기업에선 총수가 전문경영인들의 반대를 뛰어넘는 결단을 내렸고 책임을 져왔던 것이다.
총수 중심의 의사 결정 시스템이 종종 기업의 운명을 좌초시키거나 불법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살아남아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은 그 시스템이 잘 작동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및 기소 여부를 두고 ‘이재용이 없으면 삼성이 망하는가’라는 질문이 각계각층에서 나오고 있다. 답은 명확하다. 망하진 않더라도 뛰어나긴 힘들어진다. 한 기업이 생존했던 기존 방식이 흔들리고, 불확실성이 커진다. 기업은 당장 망하지만 않으면 괜찮은 게 아니라 성장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도태될 수 있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