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그 시절 진부한 이야기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남은 여자는 애 셋과 함께 힘들게 살았습니다∼”로 끝나게 놔두지 않았다. 그날 동사무소에 찾아가 직원에게 부탁했다. “애들 성 바꿔 주세요.”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친구는 들으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너무 너무 멋있다!” 손녀는 그 시간을 견뎌낸 할머니가 자랑스러웠고, 그렇게 이어 받은 자기 성이 소중해졌다.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한국에서 엄마 성을 쓸 수 있게 된 지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빠 성 쓰기가 원칙이다. ‘부성 우선주의’에 기반한 법제도는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문화를 만든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성씨를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 차원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 구성원의 위상을 결정하는 것이며 부성만을 고집하는 것은 여성을 남성의 가계에 편입하고 부계 혈통을 이어가는, 부차적이고 도구적인 위치에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엄마의 성을 딸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한 박기용 이수연 씨 부부는 “우리의 선택을 통해 여성도 자녀에게 성을 물려줄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한 언론사에 기고한 ‘딸에게 쓰는 편지’에서 밝혔다.
어떤 욕망은 내 안에 있어도 모른다.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여성에게도 자식에게 내 성을 물려주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인생에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 기분이다. 더 나아가, 일대일 이성애 결합으로 이루어진 커플 외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원의 삶도 반영할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 제도도 기대한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