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콘텐츠 제2 전성시대
김재희 문화부 기자
“좀비물은 리얼리티를 살렸을 때 잔인해질 수밖에 없어요. ‘킹덤’이 지상파로 갔을 때 ‘15세 등급을 받을 수 있을까’ ‘시청률은 나올까’를 고민하던 중 넷플릭스가 ‘사극 좀비’의 가능성을 보고 과감하게 제작을 결정했습니다.”(이상백 에이스토리 대표)
“회당 제작비가 10억 원이 넘었던 드라마였는데 지상파에선 그에 상응하는 방영권 금액을 지불할 수 없었어요. 넷플릭스가 높은 액수에 판권을 사면서 제작비를 메울 수 있었죠.”(A 드라마 스튜디오 부장)
2016년 1월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넷플릭스는 비용이나 소재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제작이 좌초됐던 드라마들에 과감하게 투자하면서 국내 콘텐츠 시장에서 빠르게 몸집을 키워 가고 있다. 콘텐츠의 완성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제작 경험, 이를 세계 190개국 1억5000여 명의 구독자에게 한 번에 선보일 수 있는 유통의 이점을 누리기 위해 국내 제작사들은 적극적으로 넷플릭스와의 협업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 ‘큰손’ 넷플릭스…기존 한국 드라마 회당 제작비의 5배 투자
‘킹덤‘ 시즌2에서 왕세자 이창(주지훈)이 활을 쏘는 모습. ‘킹덤‘ 시즌2는 3월 공개 직후 동남아시아 넷플릭스 톱10에 올랐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가 등장하면서 차원이 달라졌다. 에이스토리가 2019년 1월 선보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 시즌1은 회당 제작비가 약 23억 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한국 드라마 제작비의 5배다. 높은 제작비는 콘텐츠의 완성도로 이어질 수 있다.
넷플릭스가 제작사에 추가 수익원 역할을 하는 것도 대작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드라마 제작사의 수익은 방송사들이 드라마를 방영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국내 방영권, 광고 수익인 PPL, 해외 판권 등으로 구성된다. 이에 더해 넷플릭스라는 ‘OTT 판매 수익’이 생겼다.
넷플릭스로 OTT 판매 수익 덕을 톡톡히 본 곳은 CJ ENM의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 드래곤이다. 스튜디오 드래곤이 2018년 총 400억 원을 들여 제작한 ‘미스터 선샤인’에 넷플릭스는 제작비의 70%에 해당하는 280억 원을 내고 독점배급 판권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독점배급 판권은 특정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독점으로 콘텐츠를 배급할 권리다. 넷플릭스는 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미스터 선샤인을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는 오리지널 콘텐츠로 배급했다. SBS는 ‘미스터 선샤인’ 기획 단계부터 눈독을 들였지만 방영권 금액을 감당하지 못해 편성을 포기했다.
소재의 제약도 사라져 드라마의 다양성을 높이고 있다. 지상파 3사 드라마는 광고가 주요 수익원이기에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넷플릭스의 수익은 유료 회원 가입자들이 내는 구독료에서 나온다. 광고주가 아닌 ‘구독자가 왕’이기에 콘텐츠의 신선함과 완성도가 중요하다. 윤 대표는 “예전에는 ‘이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면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어떻게 잘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 베트남 넷플릭스 톱10 중 8편이 한국 드라마
넷플릭스도 한국을 필요로 한다.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 시장에서 갖는 큰 영향력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구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콘텐츠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 드라마 확보는 곧 아시아권의 구독자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 넷플릭스 가입자 수는 한계에 달했기 때문에 추가 구독자를 창출할 수 있는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는 데 한국이 전진기지가 되는 셈이다.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에서 누리는 인기는 수치로 확인된다. 넷플릭스가 2월 25일부터 공개하기 시작한 일간 ‘톱10’이 지표다. 일본 태국 베트남 싱가포르 대만 등 아시아권 국가의 일간 톱10 TV 프로그램 순위에서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 SBS ‘더킹: 영원의 군주’, JTBC ‘쌍갑포차’ 등 한국 드라마가 1∼10위를 독식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기준 베트남에서는 톱10 중 8편이 한국 드라마였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tvN ‘사랑의 불시착’, JTBC ‘이태원 클라쓰’,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1∼3위를 차지했다.
특히 디즈니, 픽사, 마블, 스타워즈, 내셔널지오그래픽 다섯 개 채널을 보유한 디즈니플러스가 올해 6월 일본과 인도를 시작으로 아시아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한국 콘텐츠 수급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지상파 관계자는 “방영이 끝난 작품을 포함해 한국 콘텐츠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넷플릭스가 확보한 한국 콘텐츠 방영권은 2016년 60여 편에서 2018년 550여 편으로 급증했다.
○ “콘텐츠 제작 하청업체화 경계해야”
기회의 땅에는 이면도 존재한다. 넷플릭스가 글로벌 OTT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콘텐츠 제작을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국내 콘텐츠 제작사가 넷플릭스의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내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몇 년 뒤에는 넷플릭스가 국내 최대 드라마 발주처가 될 거란 얘기가 돈다”고 털어놓았다. 넷플릭스는 아시아 시장 진출의 ‘테스트 베드’인 한국 시장에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공격적으로 늘리는 중이다. 2017년 ‘옥자’를 시작으로 2018년 5편, 2019년 9편이 만들어졌다. 올해는 킹덤2와 인간수업, 예능 ‘투게더’를 선보였다. 회당 제작비가 30억 원으로 알려진 웹툰 원작 드라마 ‘스위트홈’ 등 총 8편의 드라마가 제작될 예정이다.
분명한 건 넷플릭스와의 협업을 통해 해외 콘텐츠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작사들도 이를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스튜디오 드래곤이 지난달 미국 콘텐츠 제작사 ‘스카이댄스’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tvN ‘호텔 델루나’ 리메이크를 공동 기획 및 제작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스튜디오 드래곤 관계자는 “할리우드 업체와 콘텐츠 판매 계약이 아니라 공동 기획·제작 계약을 체결한 건 국내 최초다. 넷플릭스를 발판 삼아 해외에 직접 지사를 세우고, 공동으로 드라마를 기획하고 제작해 IP를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김재희 문화부 기자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