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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의 끝[횡설수설/송평인]

입력 | 2020-07-03 03:00:00


영구 미제로 끝날 것 같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전모는 우연한 계기로 밝혀졌다.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은 지난해 7월 부임하기 전 경찰청 수사국장을 지낼 때 제보 하나를 받았다. 화성 연쇄살인범이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는 제보였다. 지목된 사람은 나중에 진범으로 밝혀진 이춘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증거물들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다시 분석을 의뢰한 것은 바로 그 제보 덕분이다.

▷피해자들의 유류품을 범죄 공소시효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존해 둔 것이 의도치 않은 신의 한 수였다. 그렇지만 30년이 지났는데 DNA가 분석되리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분석을 맡긴 지 약 한 달 뒤 9차 피해자의 유류품에서 분석 결과가 나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유류품은 비닐이 아니라 종이봉투에 담겨 보관됐는데 자동적으로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면서 보존 상태가 뜻밖에 양호했던 것이다. 분석 결과를 수감 중인 범죄자들의 DNA와 비교해 보니 별도의 처제 살인 사건으로 수감 중인 이춘재의 것으로 나왔다. 경찰의 추궁 결과 화성 연쇄살인은 지금까지의 10건에서 14건으로 늘었다.

▷이춘재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길을 배회하며 대상자를 물색하는 타입이었다. 비가 올 때는 더했다. 당시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가려면 긴 시골 논길을 걸어야 했던 경기 화성 지역은 그의 범행에 취약한 환경이었다. 2004∼2006년 서울 서남부와 경기 지역에서 13명을 살해한 정남규도 비만 오면 지하철을 타고 아무 역에서나 내려 대상자를 물색했다. 이들의 범죄 대상은 일관되게 연약한 여성이었다. 성폭행으로 시작했으나 피해 여성의 반항을 제압하다가 살인으로 이어졌고 이후 더 가학적인 성욕을 드러냈다.

▷범죄의 전모가 드러나자 수사의 민낯도 드러났다. 이춘재는 이전에 세 번이나 용의선상에 올라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음모(陰毛) 때문에 한 농기계 가게 종업원은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그를 검거한 순경은 경장으로 특진했으나 이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범인의 혈액형은 B형이라는 증거가 나왔다고 했으나 이춘재는 O형이었다. 진흙 속에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245mm 신발의 발자국이 발견됐다고 했으나 그의 발 크기는 265mm인 것으로 드러났다.

▷역사가들은 아직도 19세기 산업화 단계 영국 런던의 연쇄살인범 잭 리퍼를 연구한다. 이춘재의 화성 연쇄살인에 대해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하지 못하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 싶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전모가 밝혀졌으니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낳은 성장 배경과 범죄 환경을 철저히 연구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