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유모 씨(38)는 2018년 결혼하면서 서울 영등포구의 한 주상복합아파트에 5억8000만 원짜리 전셋집을 얻었다. 맞벌이인 그는 전세로 사는 2년간 집을 사기 위해 악착같이 6000만 원을 모았다. 하지만 그 새 집값이 저축액보다 훨씬 많이 뛰었고, 그나마 대출 규제 강화로 차액을 빌릴 수도 없게 됐다. 결국 그는 집을 사는 대신 같은 단지 내 다른 전셋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집값이 날이 갈수록 치솟는데 정부가 주택 시장 안정화를 이유로 대출 규제를 강화하면서 무주택자들의 허탈감이 커지고 있다.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속도보다 집값 상승 속도가 빠른데,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의 한도는 갈수록 낮아져 ‘금수저’나 현금부자가 아니고선 내 집 마련이 어렵다는 불만이 나온다.
3일 경제부처 등에 따르면 현 정부 출범 직후 서울 기준 각각 70%, 60%였던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은 각 40%로 줄었다. 9억 원보다 비싼 아파트를 살 때 9억 초과분은 LTV가 20%만 적용되고 15억 원 이상 아파트를 살 때는 대출이 아예 안 된다.
이처럼 정부가 대출 한도를 옥죄는 이유는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몰리는 유동성을 제어할 마땅한 방도가 없어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부동산과 주식, 가상화폐 시장 등을 옮겨 다니며 쏠림현상을 빚고 있지만 경기가 부진하다 보니 섣불리 금리를 끌어올릴 수 없어 대출 규제로 수요를 잠재우려는 취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융위기 때인 2008년 12월 1430조 원이던 통화량(M2·광의통화)은 작년 말(2908조 원) 두 배로 늘었다. 이 기간 동안 주택담보대출 평균금리는 연 6.81%에서 2.45%로 떨어졌다.
유동성 관리에 어려움을 겪던 정부는 주택 수요를 억제하려 대출 규제를 강화해 왔지만 집값을 잡는데 실패했다. 이에 매번 더 강화된 대출 규제를 내놓자 집값 상승과 대출 제한 압력을 동시에 받게 된 미래의 실수요자까지 서둘러 주택을 사들이는 소위 ‘공포 구매(panic buying)’가 발생하고, 이는 다시 집값을 자극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동아일보가 시중은행에 의뢰한 결과에 따르면 연소득 8000만 원인 무주택 부부가 서울 동작구 흑석한강센트레빌 2차 아파트(전용 84㎡)를 살 때 2017년 6월(매매가 8억9500만 원)에는 대출을 끼고 본인 자금 3억9200만 원이 필요했지만 올 6월(매매가 12억5000만 원)에는 자기 돈 8억5700만 원이 필요하다. 집값은 뛰었지만 대출 가능액은 줄어든 때문이다.
정부 지원도 서울의 경우 갈수록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표적인 서민정책자금인 보금자리론은 6억 원 이하 집을 사는 무주택자에 최대 3억 원까지 빌려준다. 하지만 서울 집값이 크게 오르면서 이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 집 자체가 적어지고 있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서울의 6억 원 이하 아파트는 현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엔 60%대였지만 올해는 30%로 줄었다.
무주택자에게 유리한 내집마련 수단인 아파트 청약조차 2017년 8·2대책 이후 가점제 물량이 확대되면서 20, 30대 젊은 층에겐 ‘그림의 떡’이 돼버렸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정부가 경기 침체 상황에서 금리를 올려 유동성을 흡수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대출규제 등 수요 억제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현재의 정책이 장기적으로 가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놨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수요를 충족시켜준다는 시그널을 주지 않은 채 대출만 조이는 방식으로는 집값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세종=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
세종=주애진기자 ja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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