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순덕 칼럼]체제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입력 | 2020-07-09 03:00:00

“北 김여정의 폭언은 대남 충성테스트”
친북 안보라인 인사로 충성 맹세한 셈
북핵 폐기 아닌 평화를 원하는 나라
文에 대한 반대를 못 참는 나라에서 자유민주 체제가 이겼다고 할 수 있나




김순덕 대기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박지원은 방송가의 아까운 논객이었다. 자칭 정치 9단에 능란한 말솜씨로 총선 낙선 뒤 외려 천직을 찾은 듯했다. 지난달 북한 김여정의 앙칼진 말폭탄에 통일부 장관이 물러나자 그는 “북한에서 자기들이, (김여정) 제1부부장이 한 번 흔드니까 다 인사조치되고… 이런 것도 나쁜 교육이 될 수 있다”고 사이다 발언을 했다.

그때만 해도 박지원은 국정원장 발탁을 몰랐던 것 같다. 자신이 어찌 될지는 권력자도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다. 하지만 북한에 관해선 우리 국민도 알 만큼 안다. 김여정이 “확실하게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며 장래의 주북(駐北) 대사관을 폭파하고 군사행동을 예고해도 불안, 공포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북한이 어려우니 대북지원과 대북제재 해제를 확실하게 해내라는 의도가 너무 빤해서다.

불안과 공포를 자아낸 건 우리 정부의 반응이었다. 미국외교협회 스콧 스나이더 선임연구원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충성 테스트에 직면했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김여정이 대북전단은 물론이고 민주국가인 남한 내에서의 대북 비판까지 억압하는 유화조치를 요구했다고 본 거다.

정부는 북한인권 단체 설립 취소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대협 초대의장 출신의 통일부 장관, 대북 송금의 주역 국정원장, 북한전문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 안보라인을 친북적 인사로 물갈이했다. 북한관광, 개성공단 재개 등 북에서 원하는 모든 걸 남측 대통령이 해주겠다는 확실한 메시지다. 이 정도면 충성 테스트 통과 수준이 아니라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는 삼배고두(三拜叩頭)라고 할 판이다.

왼쪽 뺨을 맞고 오른쪽 뺨까지 내준 데 감읍해 김정은이 핵을 폐기한다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다. 기이하게도 새 안보라인은 북핵 폐기에 큰 무게를 안 두는 눈치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대북제재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한반도 평화”라고 봉창 뜯는 소리를 했다. 그럼 북핵 폐기라는 목적 없이 괜히 유엔이 북한을 제재한단 말인가.

서훈 안보실장 내정자와 박지원도 ‘스몰딜+α’로 제재 완화를 꾀할 모양이다. 모든 핵을 신고·폐기하는 게 아니라 2018년 하노이 회담 때 북한이 주장한 영변 핵시설 폐기에서 약간만 더하는 식이다. 마침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밝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노려 덜컥 합의해버리면, 우리는 핵을 감춘 북한과 살아야 하는 운명이 된다.

북핵과의 평화롭지 못한 공존이 그래도 전쟁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문 대통령은 6·25전쟁 70주년 기념연설에서 “남북 간 체제경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고 했다. 우리 국내총생산(GDP)이 북한의 50배가 넘는다는 맥락을 보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승리했다는 의미 같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와 기본권을 누리고 살아야 김정은도 개과천선을 고려할 수 있다. 북에서 민주화를 원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따로 살든 같이 살든 평화도 가능해진다. 북한 ‘최고 존엄’의 여동생이 신경질 부렸다고 장관을 갈아 치우는 나라는 총 한 방 안 맞고 항복한 식민지나 다름없다. 전체주의 독재자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막는 법까지 만든다면 자유민주체제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3차 추경안 국회 본회의 표결에 반대표를 던진 열린민주당 의원이 ‘문파’의 공격에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헌법대로 양심에 따라 직무수행을 하는 국민의 대표에게 마오쩌둥 시대 홍위병처럼 달려드는 나라에선 자유민주주의가 배겨날 수 없다. 문 대통령에 대한 손톱만 한 반대도 용납지 않는 체제는 이미 전체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우리의 체제를 북한에 강요할 생각도 없다”고 했다. 일국양제(一國兩制)의 국가연합, 또는 북한이 주장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가자는 의미라면 불길하다. 중국의 홍콩 탄압이 만천하에 보여주듯,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6·25전쟁을 내전이라 했던 문재인 정부다. 비판세력을 토착왜구로 몰아붙이는 이유가 북에 정통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면 섬뜩하다.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끝났다지만 그건 서구의 시각일 뿐이다. 전체주의 중국공산당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한 신(新)냉전시대, 체제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