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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최숙현 옭아맨 ‘불공정 계약’… “선수는 계약해지 이의제기 불가”

입력 | 2020-07-09 03:00:00

[체육계 폭력]경주시청팀 계약조건 논란




고 최숙현 선수가 2017년 경주시청 직장운동부 트라이애슬론팀에 처음으로 입단할 때 작성한 서약서(왼쪽)와 입단계약서. 최 선수를 비롯한 팀 선수들은 1년마다 재계약해야 했다. 고 최숙현 선수 유족 제공

“감독이 숙현이에게 ‘너 지금 그만두면 위약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숙현이는 그래도 나가고 싶어 했다.”(고 최숙현 선수 아버지)

지난달 최 선수가 폭력 등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뒤 “체육계는 왜 이런 고질적인 문제가 반복되느냐”는 논란이 커졌다. 그런데 동아일보에서 입수한 최 선수의 계약서를 보면 가혹행위를 감수해야 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해당 계약서의 제5조에는 “계약 만료 후에는 재계약에 있어서 ‘갑’(경주시체육회장)이 우선권을 가진다”고 나온다. 이 선수단은 1년마다 재계약하도록 돼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부의 한 부장판사는 “계약 기간이 끝나도 선수가 쉽게 다른 곳에 가지 못하고 ‘갑’이 재계약 우선권을 가진다는 내용이다. 선수에게 불리한 계약으로, 선수를 팀에 ‘얽어매는’ 꼴이 될 수 있다”고 평했다.


○ ‘타 팀 이적 시 동의’ 조항에 발 묶여
최 선수 역시 2017년 경북체고를 졸업한 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팀에 입단하며 경주시체육회와 1년마다 계약을 갱신했다. 최 선수는 컨디션 저조로 운동을 쉰 2018년을 제외하고 2017년, 2019년에 계약했다. 한 체육계 인사는 “재계약은 물론 이적에 결정적인 권한을 가진 감독의 말을 거스르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계약 근거가 되는 ‘경주시청직장운동경기부 설치 및 운영관리 내규’는 더 문제가 많다. 내규에 포함된 ‘선수단 입단협약서’ 제10조에는 “타 운동부 소속으로 이적할 때에는 단장 및 감독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정해 놓았다. 민사부 부장판사는 “입단협약서가 최 선수의 개인 계약서보다 더 불공정하다. 재계약 시 우선권을 가지는 것을 넘어 감독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건 ‘갑’에게 더욱 유리한 계약이다. 동의를 못 받으면 다른 데 못 가는 것”이라 설명했다.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임용계약서 제4조 라항)와 “‘갑’은 ‘을’이 전국 또는 도민체전 기타 경기에서 성적이 부진할 경우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입단협약서 제8조 4항)도 선수에게 불리한 계약 조건으로 꼽혔다. “을’(선수)은 각 항의 계약 해지 사안에 대해 일체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입단협약서 8조 5항)도 마찬가지다. 경주시체육회 관계자도 “올해 내규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꼼꼼하게 검토가 안 된 것 같다”며 문제를 시인했다.

6일 추가 피해를 증언했던 A 선수의 어머니는 “딸이 ‘엄마가 위약금을 대신 내줬으면 좋겠어. 난 여기서 그만하고 싶어’라고 2, 3차례 말했다”고 했다. 경주시체육회에 따르면 감독이 말한 ‘위약금’은 한 번도 집행된 적은 없다.


○ 체육계도 ‘표준근로계약서’ 도입해야
선수들이 불리한 계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던 건 공정한 계약을 보장하는 ‘표준근로계약서’가 없기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실업팀 선수들의 계약을 일괄 규정하는 표준계약서는 없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사정에 따라 계약서를 작성한다”고 했다.

여준형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는 “선수들은 대부분 계약서에 서명하러 가서 계약서를 처음 본다. 사전 검토할 기회도 없다. 이의 제기라도 하면 ‘계약하지 말자’는 분위기로 몰고 가 불만이 있어도 말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탤런트 고(故) 장자연 씨의 사건을 계기로 2009년 7월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를 만들었다. 한 실업팀 관계자는 “체육계도 표준계약서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조응형 yesbro@donga.com·박종민·박상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