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입성한 백선엽 장군 1950년 10월 19일 백선엽 당시 육군 1사단장(왼쪽)이 평양에 입성한 뒤 프랭크 밀번 미군 1군단장에게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 백 장군이 군 역사 기록물로 육군에 기증한 사진이다. 동아일보DB
살아생전 그는 항상 자신을 ‘노병’으로 불러달라며 스스로를 낮추며 “시대가 부여한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백 장군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평남 강서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많은 누나 효엽과 세 살 어린 남동생 인엽과 함께 보낸 유년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7세 때 부친(백운상)이 작고하자 모친(방효열)은 삼남매를 데리고 평양으로 옮겨 힘든 생계를 꾸렸다.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한 그는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만주국 장교로 복무하던 중 해방이 되자 그는 미군정이 조직한 국방경비대의 중위로 임관해 한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후 1사단장(당시 29세) 재임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단장과 육군참모총장 등을 맡아 최전선에서 군을 지휘하며 여러 차례 기념비적인 전과를 올렸다.
백 장군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추앙받는 전쟁영웅이다. 주한미군은 그를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대우한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한국전쟁의 영웅이신 백선엽 장군님’이라고 부르며 이·취임사를 시작하는 게 전통이다. 미군 장성 진급자와 미 국방부 직원들도 방한하면 백 장군을 만나는 게 필수코스다. 주한 미8군은 미군 부대에 배속된 한국군(카투사·KATUSA) 우수 병사에게 주는 상을 ‘백선엽상’이라 명명했다. 2013년 8월엔 미 8군은 그를 ‘미8군 명예사령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미 8군은 “6·25전쟁 당시 한반도를 방어하는 데 탁월한 업적을 달성했고 한국의 미래를 결정해 온 역사적 순간의 증인”이라고 존경의 뜻을 전했다.
그가 1992년 펴낸 영문판 ‘From Busan to Panmunjeom(부산에서 판문점까지)’ 등은 미국내 전사(戰史) 부분의 스테디셀러다. 미 국립보병박물관은 백 장군의 6·25 경험담을 육성으로 담아 전시하고 있다. 자서전인‘군과 나’는 미국의 주요 군사학교에서 교재로 쓰인다.
백 장군은 휴전 이후 한국군의 재건과 숙군작업, 국방력 강화에 주력했다.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으로 진급했고, 초대 1야전군사령관으로서 아시아 최초로 야전군을 창설했다.
그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1949년 군이 남로당 연루자를 가려내는 숙군(肅軍) 작업을 할 때 당시 정보국장이던 백 장군은 남로당 연루 혐의로 조사를 받던 박정희 소령의 구원 요청을 수용해 육본에 재심을 요청했다. 그의 배려로 박 소령은 불명예 제대로 일단락됐다. 몇 년 뒤 군에 복귀한 박 전 대통령이 소장 진급 과정에서 좌익 활동 전력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참모총장이던 백 장군이 보증을 섰고 박 전 대통령이 준장 시절 미국 포병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고령의 나이에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과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강연과 저술 활동을 계속해 왔다.
6·25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 1128일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전선을 지키며 공산군과 사투를 벌였다. 전쟁 기간 1사단장과 군단장, 육군참모총장 등을 맡아 군을 지휘했다. 휴전회담의 유엔군 측 초대 한국군 대표도 맡았다.
태극무공훈장(2회),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 캐나다 무공훈장 등을 비롯해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티 ‘2010 밴 플리트 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전쟁一千日’(1988), ‘軍과 나’(1989), ‘실록 지리산’(1992), ‘한국전쟁Ⅰ,Ⅱ,Ⅲ’(2000), 회고록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2010), ‘노병은 사라지지 않는다’(2012) 등이 있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손효주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