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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의 마지막 길에 합당한 예우해야

입력 | 2020-07-13 00:00:00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10일 별세했다. 그는 여순반란사건 이후 국방부 정보국장으로 남로당 관련 숙군(肅軍)작업을 지휘해 명령이 통하는 군대를 만들었다. 6·25 전쟁 발발 후에는 1사단장으로 경북 칠곡 인근의 다부동 전투에서 낙동강 방어전선을 지켜냈다.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면 대구를 내줄 수밖에 없고 부산 함락도 시간 문제였다. 그는 “내가 물러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라고 명한 후 선두에서 돌격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에는 평양 진군의 선봉에 섰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후퇴해 38선에서 교착상태가 이어질 때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이끌어 적의 후방교란을 차단했다. 6·25전쟁의 결정적 국면마다 백 장군이 있었다.

백 장군은 남다른 군 지휘능력과 영어 실력으로 한미연합작전의 빼놓을 수 없는 한국 측 주역이었다. 그는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6·25전쟁 중 32세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고 이듬해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군사장비도 전투 경험도 부족한 한국군을 우습게 취급하던 미군도 백 장군의 실력과 용기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에게 한미방위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설득한 것도 그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은 한국에 부임하면 백 장군을 찾아 인사하는 것을 지금까지도 관례로 삼아왔다. 한미군사동맹의 상징 같은 인물이 떠났다.

존경받는 노장(老將)으로 늙어가던 그를 뒤늦게 ‘친일파’라고 낙인찍고 나온 것은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다.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백 장군이 부임한 1943년 무렵에는 간도에 있던 독립군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뒤였다. 당시 간도특설대가 상대한 것은 주로 중국공산당 팔로군이었다고 한다.

여권 일각과 좌파성향 단체들은 백 장군의 서울현충원 안장은 물론이고 대전현충원 안장마저 거부하고 있다. 보훈처는 서울현충원이 포화상태라는 이유로 백 장군의 대전현충원 안장을 결정했다. 백 장군은 생전에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며 대전현충원 안장 결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장군의 품격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 하지만 6·25전쟁 전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서울현충원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백 장군은 가능한 방법을 찾아내 서울현충원에 모셔야 한다. 당장 안 된다면 차후에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준 전쟁 영웅에 합당한 예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