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동아플래시100]망명보다 효도…끝내 사형…새벽 3시 장례식 ‘통곡’

입력 | 2020-07-14 11:40:00

1921년 8월 17일





플래시백
『죽은 자식이나마 5년 만에 만났으니 다만 하룻밤이라도 내 방에서 같이 자야 하겠소.』

동아일보 1921년 8월 17일자 3면에 실린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친아버지 박시규의 한 맺힌 말입니다. 박상진은 8월 11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1918년 2월 일제 경찰에 붙잡힌 뒤 1년 6개월 만에 37년의 생을 마감했죠. 박상진이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최대 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체포되기 전 안동의 한 마을에 숨어 망명 기회를 엿보던 박상진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친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직후였죠. 친어머니를 임종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일제 경찰 눈에 핏발이 서 있었을 무렵이었죠. 고향에 가는 즉시 잡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망명보다 효도를 우선했고 결국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박상진은 1884년 울산에서 7000석지기 유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매년 44㎏ 기준 쌀 3만5000가마를 거두는 부호였죠. 친아버지와 양아버지 모두 문과에 급제해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큰아버지 박시룡에게 입양 간 그는 14세 때 스승 허위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허위는 을미의병으로 일어섰고 을사늑약 뒤에는 의병 연합부대인 13도창의군 군사장으로 활약했던 유림이었죠. 박상진은 허위가 1908년 교수형을 당하자 피신한 가족을 대신해 서대문감옥으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왼쪽은 박상진 대한광복회 총사령의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 오른쪽은 이 사진을 토대로 그린 초상화. 사진 제공=증손자 박중훈 씨



1908년은 박상진이 신학문인 법률과 경제를 배우던 양정의숙을 졸업하던 해였습니다. 2년 뒤 판사 등용시험에 합격했지만 평양지원 발령을 마다하고 사직했죠. 그는 양정의숙을 다닐 때 이미 평민의병장 신돌석, 김좌진과 의형제를 맺었을 정도로 독립운동 연결망을 짜놓았습니다. 1910년 무렵에는 안창호가 주도한 신민회에 참여했죠.

신민회 해산 뒤에는 만주와 연해주 상하이 난징 등을 오가며 할 일을 찾았습니다. 양정의숙의 학우들과는 곡물무역업체 상덕태상회를 세워 군자금을 마련했죠. 마침내 1915년 7월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세우고 총사령이 됩니다.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우는 것이 목표였죠.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경주 우편마차나 운산금광 현금수송마차 습격에 나섰습니다. 허위가 추천해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이 의병 봉기 때 약속한 돈을 주지 않고 밀고까지 하자 처단했고 주민 원성이 높았던 충남 도고면장 박용하도 처치했습니다. 이 일로 일제의 대대적 검거바람이 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자 친아버지는 일본 도쿄까지 가서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죠. 김좌진은 1919년 경성으로 잠입해 종로구치감에 있던 박상진을 탈옥시키려고 했으나 가족의 반대로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친아버지는 싸늘하게 식은 아들을 두고 형님 걱정까지 하며 눈물짓습니다. 팔십 노인이 양자의 사망 전보를 보고 놀라 줄초상이 날까봐 불안했던 것이죠. 박상진의 동생은 3일 전 아들을 면회하게 해 달라고 해서 연락했는데 아들도 못보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기자가 부친과 동생을 만난 날은 8월 11일이지만 기사가 17일자에 실린 이유는 검열을 의식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일제는 박상진 운구 때 군중이 몰리지 못하도록 막아 장례식을 새벽 3시에 치를 수밖에 없었죠.

박상진은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려는 복벽파에서 공화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비밀 암살 폭동 명령의 4대 강령을 실천했던 그의 사상은 이후 신간회와 의열단으로 전해졌죠. 그의 동생과 아들은 대한광복회의 뒤를 잇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으로 활동해 형님과 부친의 뜻을 이어받았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五年(5년)만에
愛子(애자)의 屍體(시체)를
붓들고 우는 박상진의
부친 박시규 씨의 경상

일시 세상의 이목을 놀내이며 경관의 머리를 압흐게 한 광복회댱(光復會長) 박상진(朴尙鎭)은 대정 륙년에 톄포되야 오날에 이르기 오년 동안을 감옥이란 생디옥에서 텰창생활을 하다가 일심 복심 삼심의 사형선고를 밧고 교수대의 이슬이 될 날만 기다리다가 맛참내 지난 십일일 오후 한시에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 대구감옥 교수대 상의 혼으로 화하고 마랏다 함은 임의 보도한 바어니와

이에 대하야 박상진의 친부 박시규(朴時圭)씨를 본뎡에 잇는 그의 처소로 방문한즉 씨는 얼는 보기에도 텬디가 빗이 업시 보이는 듯한 얼골로 긔자를 마즈며 『오년 만에 죽은 자식을 맛나보게 되얏소. 이에 대하야 무어라고 말할 줄은 생각이 아니나오. 오늘이라도 곳 고향 경주로 반구를 할 터이나 뜻밧게 일임으로 여러 가지의 준비가 미비할 뿐만 아니라

비록 아모 것도 알 수가 업는 죽은 자식이나마 오년 만에 부자 상봉이닛가 다만 하로밤이라도 나 자는 방에서 갓치 자야 하겟소. 이 일은 오후 세시에 비로소 아랏슴으로 아는 즉시로 경주에 잇는 나의 형의게 전보를 첫는대 엇더케 되얏는지 모르겟소. 이 죽은 자식은 나의 형의게 양자를 갓소.

그럼으로 놀나운 소식을 들은 형님은 팔십이나 되는 로인으로 다못 저 자식의 반가운 소식이나 올가 하고 기다리던 차에 긔졀이나 아니하얏는지 모르겟소. 깟닥하면 두 초상이 날는지도 모르겟소. 『사자는 귀토』로 오히려 반구할 필요도 업시 아모 대나 무들 것이나 보통과 다른 생리별을 하고 마지막에는 영리별까지 된 부모와 처자가 고향에서 울고 잇슬 터이니 죽은 얼골이나 한번 보게 하지 아니치 못하겟소. 십이일이나 십삼일에는 꼭 반구를 하겟소』라고 눈물을 머금고 말을 하는대

그의 말을 다 듯고 겻방에서 시톄를 겻헤놋코 방성통곡하는 박상진의 동생을 가본즉 눈물을 씨스면서 『집행한 삼일 전에 형님의 면회를 하얏는대 임의 신문지상에 발표된 것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니면서 우닛가 형님의 말삼이 내가 지금까지 사라잇는 것도 너희와 부모를 위하야 오히려 고통을 더 바닷다. 형뎨의 정의로는 그러하리라 만은 울 까닭은 업다고 태연한 우숨을 띄우면서 말삼하며 내 족하되는 형님의 아달을 면회 식혀달나』 하야 곳 경주로 통지하얏는대 오늘 이러케 된 줄은 도모지 몰낫소』 하는 바

박상진은 이십오세까지 한문공부를 하얏스며 그 후에 전 법관양성소와 대동학교(大東學校)를 졸업하고 법정사로 얼마동안 잇다가 대구에서 상업을 경영하얏스며 상업을 그만두고 가정에서 한가히 농사에 착미를 하고 잇던 가운대 광복회사건이 이러나 톄포되얏다 하며 형뎨는 삼형뎨로서 맛이며 그의 가정에는 금년 이십일세의 아달 하나를 두어 늣도록 한문을 일키다가 직금 보통학교에 다니는 중이며 그는 당년이 삼십팔세이라더라. (대구)

현대문

5년 만에
사랑하는 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우는 박상진의
부친 박시규 씨의 슬픈 모습


한때 세상 이목을 놀라게 하며 경찰의 머리를 아프게 한 광복회장 박상진은 1917년 체포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을 감옥이라는 생지옥에서 철창생활을 하였다. 1심 2심 3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대의 이슬이 될 날만 기다리다 마침내 지난 11일 오후 1시에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 대구감옥 교수대의 혼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이미 보도하였다. 이에 대해 박상진의 친아버지 박시규 씨를 충무로에 있는 숙소로 방문해 보니 그는 얼른 보기에도 천지에 빛이 없어 보이는 듯한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5년 만에 죽은 자식을 만나보게 되었소.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지 생각이 나지 않소. 오늘이라도 곧 고향 경주로 반구(返柩)를 하려고 하지만 뜻밖의 일이어서 여러 가지 준비가 미비하오. 뿐만 아니라 비록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죽은 자식이나마 5년 만에 부자 상봉이니까 다만 하룻밤이라도 내가 자는 방에서 같이 자야 하겠소. 이 일은 오후 3시에 비로소 알았으므로 아는 즉시 경주에 있는 나의 형에게 전보를 쳤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이 죽은 자식은 나의 형에게 양자를 갔소. 그러므로 놀랄 만한 소식을 들은 형님은 80이나 되는 노인으로 다만 저 자식의 반가운 소식이나 올까 하고 기다리던 차에 기절이나 아니하였는지 모르겠소. 까딱하면 두 초상이 날지도 모를 일이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니 오히려 반구할 필요도 없이 아무 데나 묻을 것이나 보통과 다른 생이별을 하고 마지막에는 영이별까지 한 부모와 처자식이 고향에서 울고 있을 터이니 죽은 얼굴이나 한 번 보게 하지 않을 수 없소. 12일이나 13일에는 꼭 반구를 하겠소』라고 눈물을 머금고 말하였다.

그의 말을 다 듣고 곁방에서 시체를 곁에 놓고 목을 놓아 통곡하는 박상진의 동생을 가서 보니 눈물을 씻으면서 『사형을 집행한 3일 전에 형님 면회를 하였는데 이미 신문지상에 발표된 것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까 형님 말씀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너희와 부모를 위하여 오히려 고통을 더 받았다. 형제의 정의로는 그렇겠지만 울 까닭은 없다」고 태연한 웃음을 띄우면서 말씀하며 「내 조카 되는 형님의 아들을 면회시켜 달라」고 하여 곧 경주로 통지하였는데 오늘 이렇게 된 줄을 도무지 몰랐소』라고 말하였다.

박상진은 25세까지 한문공부를 하였으며 그 후에 전 법관양성소와 대동학교를 졸업하고 법정사로 얼마동안 있다가 대구에서 상업을 경영하였으며 상업을 그만두고 가정에서 한가하게 농사에 취미를 붙이고 있던 가운데 광복회사건이 일어나 체포되었다고 한다. 형제는 3형제로서 그가 맏아들이며 그의 가정에는 올해 21세의 아들 하나를 두어 밤늦도록 한문을 읽히다가 지금은 보통학교에 다니는 중이며 박상진은 올해 38세이라고 한다. (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