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선’ 외칠수록 깊어지는 갈등… 고민과 사유 없는 실시간 댓글 넘쳐 격조 있는 논쟁만이 화해의 문 열어… 사회 희망의 척도는 결국 ‘말의 품격’
박연준 시인
갈등은 어느 한쪽이 ‘절대 선(善)’, ‘절대 정의’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 깊어진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수시로 논리의 오류를 겪는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도 전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이들이 모여 싸우고 지지고 볶으며 사는 곳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있을까? 희망이 있다면 어떤 크기인지, 어떤 모양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희망은 늘 어딘가에 ‘끼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눈과 눈 사이, 귀와 귀 사이, 손과 손 사이, 발과 발 사이에. 책과 책 사이, 집과 집 사이, 도시와 도시 사이, 대륙과 대륙 사이에 끼어 있는 것. 누구도 희망을 ‘들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끼어 있으므로 잘 보이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말로 비난하는 일은 쉽다. 잘못을 따져보고, 죄를 물은 후 기다리고, 성의 있는 언어로 생각을 주고받는 과정이 어렵다. 훌륭한 인간? 그런 게 있을까? 각자 이해와 입장, 처지가 있을 뿐이다. 덜 나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약자와 소수자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있을 뿐. 희망은 늘 사이에 끼어 있으니까, 싸워야 할 일이 있다면 거리를 지키며 격조 있게 싸워야 한다. 쉽게 내뱉은 말로 문제의 머리채를 휘어잡지 않는 것. 혁명이나 독재 타도 같은 문제라면 피 흘림도 각오해야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우선 언어에게 격조 있는 칼을 쥐여주어야 한다. 문제 상황을 두고 화를 낼 뿐인 사람이 되는 건 의미가 없다. 모두 자기 말과 자기 분노에 책임을 지고 발언해야 한다. 비방과 비난이 난무하는 곳에 그저 숟가락 하나를 얹은 후 정의를 실현한 척, 알량한 면죄부 한 장을 얻은 듯 행동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 문제의 문을 찾아내 두드리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부서질 때까지 문을 두드리기만 하는 일은 옳지 않다.
“희망은 문이 아니라 어느 지점엔가 문이 있으리라는 감각, 길을 발견하거나 그 길을 따라가 보기 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딘가 있으리라는 감각이다. 때로 급진주의자들은 문을 찾지는 않고 벽이 너무 거대하고 견고하고 막막하고 경첩도 손잡이도 열쇠구멍도 없다고 벽을 비난하는 데 안주하거나, 문을 통과해 터벅터벅 나아가면서도 새로운 벽을 찾아댄다.”(리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자가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목소리에는 반드시 품위와 인격이 담겨야 한다. 그 다음에야 희망을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박연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