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라르가 만난 파리의 예술가들/앙브루아즈 볼라르 지음·이세진 옮김/512쪽·2만2000원·현암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세잔, 르누아르 작품의 모델을 서기도 했다. 115번이나 포즈를 취해줬더니 세잔은 겨우 “셔츠 앞쪽은 봐줄 만하게 나왔다”고 말했다. 피에르 보나르가 그린 ‘고양이를 안고 있는 볼라르’(1924년). 현암사 제공
인상파가 예술가들의 힘만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면 그 진가가 드러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인상파는 섬세하고 열린 안목으로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과 함께 성장했다. 이 책은 그중 한 사람인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1867∼1939)의 자서전이다.
세잔의 그림을 처음 보고 “복부를 맞은 기분”을 느낀 볼라르는 화상이 되자마자 그의 개인전을 연다. 르누아르와도 가깝게 지냈으며 드가, 고갱, 모네, 마네와도 교류했다. 갓 스무 살이 된 피카소를 소개받고 그의 파리 첫 전시도 열었다.
책에서는 돈과 허세로 가득한 컬렉터들에 대한 냉소가 포착된다. 유명한 컬렉터인 이작 드 카몽도는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대뜸 “도대체 뭘 그린 겁니까”라고 묻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볼라르가 “목욕하는 여자들”이라고 하자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데 어디서 목욕을 하는 겁니까” 하고 다시 묻는다. 이에 볼라르가 말했다.
“당신은 모르는 게 없으니 ‘그림보다 바보 같은 소리를 더 많이 듣는 것도 없다’는 말을 누가 했는지 아시겠죠?”
물론 꿋꿋한 후원자도 있었다. 동료 인상파 작가들의 그림으로 가득했던 모네의 집 풍경은 감동적이다. 모네의 소장품을 본 볼라르는 “이 정도 수준의 소장품은 저명한 수집가에게서도 보기 어렵다”고 감탄한다. 그러자 모네는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사지 않으려 하는 그림만 가져왔소. 여기 그림 대부분은 화랑에서 팔리지 않고 굴러다니던 것들이지. 이들을 구입한 것은 대중의 무관심에 대한 항변이라오.”
이 책은 예술작품의 단단한 가치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책 말미에 볼라르는 화상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청년의 편지에 답장을 쓴다.
“나는 돈을 버는 비결은 알지 못합니다. 미술 애호가들이 화랑에 오면 나는 졸고 있었지요. 손님들은 내 잠꼬대를 거절로 오해하고 금액을 더 높이 불렀고요. 정신을 차려보면 값이 올라가 있더군요. 은총이 있기를 빕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