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3월 18일
플래시백
‘여자로서 전람회를 열기는 조선에서 처음이라 할 것이요,…섬섬옥수로 가볍게 붓을 놀려 그려낸 화폭은 완연한 여성미가 아닐까 한다.’
1921년 3월 18일자 동아일보 3면 ‘양화가 나혜석여사, 개인 전람회 개최’ 기사의 일부입니다.
1921년 3월 첫 개인전을 연 조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그는 개인전에 앞서 ‘이 땅의 여성들에게 그림에 대한 관심을 불어일으키기 위해 개인전을 열게 됐다’는 취지의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나혜석도 2월 26일자 기고 ‘회화와 조선여자’에서 화가를 ‘환쟁이’라 천시하는 풍토를 바꾸고 조선 여자들의 그림 소질을 일깨워주기 위해 개인전을 연다는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이 개인전에는 첫날 1000여 명, 이튿날에는 안내조차 포기할 정도로 관람객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문화생활에 굶주린 조선 민중들은 유화라는 서양 그림이 신기했을 뿐 아니라 나혜석 개인에 대한 관심도 컸을 겁니다.
나혜석이란 이름이 동아일보에 처음 나온 건 창간 열흘째인 1920년 4월 10일자입니다. ‘오늘 오후 3시 결혼식을 거행하는 김우영 씨와 나혜석 양’이라는 설명과 함께 신랑신부 사진이 실렸습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한 교토제국대학 출신 김우영도 명사였지만,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여권 신장을 부르짖는 글도 여러 편 발표한, 그리고 3·1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한 신여성의 대명사 나혜석은 요즘 말로 ‘최고의 셀럽’, ‘엄친딸’이었습니다.
나혜석이 1934년 8월 잡지 ‘삼천리’에 쓴 글에 따르면 그는 전처와 사별한 뒤 열렬히 구애해온 김우영에게 결혼을 승낙하며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일생을 두고 나를 사랑할 것, 그림 그리기를 방해하지 않을 것, 시어머니나 전실 딸과 떨어져 살 것. 김우영은 신혼여행 때, 죽은 나혜석의 전 애인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주기도 했죠. 둘은 3남 1녀를 낳고 장기간 구미여행을 하는 등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듯했습니다.
나혜석은 결혼 후 당시 최고 미술전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鮮展·선전)에 꾸준히 출품해 1926년 ‘천후궁(千後宮)’으로 특선의 영광을 안으며 전성기를 맞습니다. 글쓰기도 게을리 하지 않아 소설, 희곡, 수필, 시를 발표했습니다. 기고도 활발히 했는데 1921년 9월 동아일보를 통해 문인이자 역시 신여성이었던 김원주와 벌인 ‘부인의복 개량’ 논쟁은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나혜석의 대표작들. 위로부터 ① 1921년 3월 19~20일 첫 개인전에 선보인 정물화 ②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특선작 ‘천후궁’ ③ 1920년대 후반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화상 ④ 1931년 제10회 선전 특선작 ‘정원’.
그러나 나혜석은 1930년 11월 김우영과 갈라서면서 내리막을 걷기 시작합니다. 유럽 체류 중이던 1927년, 천도교 도령 최린을 만나 스캔들을 일으킨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생활고와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붓도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1931년 선전에 출품한 ‘정원’이 다시 특선으로 뽑혀 재기하는 듯했습니다. 1935년에는 경성 진고개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열고 200여 점을 전시했는데 관객은 물론 미술계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 해 말 동아일보에 실린 화가 김용준의 ‘화단 1년의 동정’은 나혜석 개인전에 대해 ‘퍽 기대했지만 태작(駄作·서투르고 보잘 것 없는 작품)만 모은 것 같았다’고 짧게 비평할 정도였으니까요.
나혜석의 고향인 경기 수원시 ‘나혜석 거리’에 조성된 그의 좌상. 뒤쪽 석벽엔 그의 시 ‘인형의 가(家)’가 새겨져 있다.
결국 나혜석은 불교에 귀의할 작정으로 오랜 벗 일엽 스님(김원주)이 있던 수덕사를 찾았지만 속세에 미련이 많았는지 이마저 포기하고 1948년 무연고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나혜석은 ‘도덕적으로 파멸한 신여성’으로 잊혀져갔지만, 미술평론가 이구열이 1971년부터 월간 여성동아에 17회 연재한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를 계기로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의 고향인 경기 수원시에 조성된 ‘나혜석 거리’를 통해 영원히 살게 됐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원문
◇洋畫家(양화가) 羅惠錫(나혜석) 女史(여사)
◇個人(개인) 展覽會(전람회)를 開催(개최)◇
십구일부터 경성일보사에서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동경미술학교』의 서양화과 졸업생으로 변호사 김우영 씨의 부인 라혜석『金雨英氏夫人羅惠錫·김우영 씨 부인 나혜석』 녀사는 대정 칠년에 동경에서 도라온 후로 이래 묵묵히 삼사개년을 지내오더니 이번 처음으로 개인 뎐람회『個人展覽會·개인 전람회』를 열고 그동안 오래동안 모혀두엇든
◇유회(油繪·유회) 륙칠십 뎜을 진렬하야 일반에게 관람케 하야 양화로는 아즉 적적한 우리 조선에 양화의 엇더한 것인 것을 소개하는 동시에 일반에게 미술(美術·미술)에 대한 관념을 보급식히고자 한다 하며 회댱은 경셩일보샤의 래청각(來靑閣·내청각)이오, 긔일은 십구, 이십 량일간이라 하는대 녀사는 말하되 『나가튼 자가 개인 뎐람회 가튼 것을 열음은 너무 급한 듯하오나 실상 자긔의 텬재(天才·천재)를 자랑하야 일반 인사에게 뵈입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긔의 실력을 널니 사회에 물음에 불과합니다. 동경에서 도라온 지가 벌서 사년이나 되얏사오나 그동안
◇직졉 간접으로 여러 가지 사정이 잇서서 이러한 시험을 하야볼 긔회도 엇지 못하얏슬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관계로 너무나 오래동안 침묵을 직히어서 엇더케 생각하오면 매우 우리 양화계를 위하야 미안한 생각도 잇슴니다. 그리하야 이번에 여러분의 원조를 바다 비록 아름답지 못하나 처음 셩적을 여러분 압헤 뵈어들이고자 하는 바이올시다. 구경하여 주시고 만히만히 가라처주시기 바람니다』하고 살작 미소를 띄웟다. 엇지 햇던지 여자로서 뎐람회를 열기는 녀사가 조선에서 처음이라 할 것이오 또 조선
◇밀슐계에 여자로는 일류라 할지라. 그의 섬섬옥수로 가비얍게 붓을 놀니어 그려내인 화폭은 완연한 녀셩미(女性美·여성미)! 그것이나 안일가 하며 녀사는 인물화보다도 풍경화에 취미가 만타 하더라.
현대문
◇서양화가 나혜석 여사
◇개인 전람회를 개최◇
19일부터 경성일보사에서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가 졸업생으로 변호사 김우영 씨의 부인인 나혜석 여사는 1918년 도쿄에서 돌아온 이후 묵묵히 3, 4년을 지내더니 이번에 처음으로 개인 전람회를 열고 그동안 오랫동안 모아뒀던
◇유화 60~70점을 진열해 일반인들이 관람케 해 서양화로는 아직 불모지인 우리 조선에 서양화가 어떤 것인지 소개하는 동시에 일반에 미술에 대한 개념을 보급하고자 한다고 한다. 전람회장은 경성일보사 내청각이고, 날짜는 19, 20일 이틀간이라 한다. 여사는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개인 전람회를 여는 것은 너무 급한 듯하지만 실상은 내가 가진 재주를 자랑해 일반인에게 보이고자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내 실력을 널리 사회에 보여 어느 정도인지 물으려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도쿄에서 귀국한 지 벌써 4년이나 됐지만 그동안
◇직접 간접으로 여러 사정이 있어서 이런 시험을 해볼 기회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너무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 탓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서양화계에 매우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이번에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비록 아름답지 못하지만 처음으로 여러분 앞에 제 실적을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디 구경해주시고, 많이많이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하며 살짝 미소를 띠었다. 어쨌든 여자로서 전람회를 열기는 여사가 조선에서 처음이라 할 것이요, 또 여사는 조선
◇미술계에서 여자로는 일류라 하겠다. 그의 섬섬옥수로 가볍게 붓을 놀려 그려낸 화폭은 완연한 여성미! 그것이 아닐까 하며, 여사는 인물화보다 풍경화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