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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신뢰의 동심원[내가 만난 名문장]

입력 | 2020-07-20 03:00:00


이진민 정치철학박사·작가

“인간이 인간답고, 그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도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럴 때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될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 ‘경철 수고’ 중



회색 활자 속에서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두통 속에서도 공부가 즐거웠다.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는 특히 사람다운 사람, 그리고 그들이 맺는 관계를 고민했던 젊은 사상가가 이후에 토해 낼 사유의 씨앗들이 푸른빛으로 들어 있었다.

사랑에도 돈이 든다. 꼭 두른 것이 화려하고 고가의 선물을 하는 연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넉넉한 환경에서 구김 없이 자라난 사람, 자신의 호기심과 취향을 가난 때문에 납작하게 질식시킬 필요가 없었던 사람, 그래서 풍부한 경험으로 자신을 알록달록하게 빚어낸 사람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돈만큼 사랑을 망가뜨리고 인간관계를 뒤트는 것도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인간이 인간다울 때, 그런 세상에서는 사랑은 사랑으로만 되돌려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로부터 사랑이 사랑으로, 신뢰가 신뢰로 교환되는 따뜻한 관계를 경험한다. 선물이라고 내미는 아방가르드한 종이배며, 유치원에서 열심히 따 모았다고 불쑥 내미는 토끼풀 꽃다발, 머리에 꽂아준다는 걸 사양하고 싶은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깃털. 아이들이 내게 들고 오는 것들을 다 받으면 거지왕 김춘삼 부럽지 않을 고물상이 될 테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신뢰를 알기에 나는 달콤하고 환하게 받는다.

사랑도 행복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세상에는 알알이 맺는 사랑과 돌탑처럼 쌓아 올리는 신뢰로만 교환될 수 있는 가치도 있음을 배우길 바라며. 이런 관계를 경험한 아이는 또 다른 관계에서 사랑이 사랑으로, 신뢰가 신뢰로 교환되는 인간적인 동심원의 고리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하며.

이진민 정치철학박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