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서울 2020년 여름
상당히 오랫동안 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으므로 “깔려 죽기 직전”이라고 했지만 사실 “직전”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저 플래카드는 사실의 기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서적 표현인 것 같다. 그 정서의 위계도 분명하다. “깔려 죽기 직전이다”에는 느낌표가 하나 붙고, “같이 죽자”에는 느낌표가 두 개 붙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 플래카드를 내건 사람의 정서를 말 그대로 표현한 것은 아니다. 느낌표가 달릴 정도의 격정은 대개 즉각적으로 표현되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저 플래카드에 들어갈 표현을 고른 뒤, 제작업체에 의뢰해서 결과물을 받고, 강변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위치를 선정하여 내걸었을 것이다. 저 플래카드는 정서의 즉각적인 표출이 아니라 공들인 기획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 박원순 시장은 죽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 저 플래카드 글귀는 바뀌었다. 새 플래카드 역시 갑작스러운 정서의 표출은 아니다. 관계자들의 의논이 있었을 것이고, 대안적인 표현에 합의를 본 뒤, 플래카드 제작업체에 의뢰해서 글귀를 수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강변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위치를 선정해서 다시 걸었다. 이제 “박원순”이라는 특정 개인은 “서울시”라는 덜 인격적인 존재로 바뀌었다. 서울시는 이제 함께 죽는 대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플래카드는 촉구하고 있다. 느낌표 두 개는 변함없다.
이전 플래카드 사진과 바뀐 플래카드 사진을 나란히 SNS에 올렸더니,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정말 같이 죽기는 싫었나 보네요”, “이런 배너 사진 찍어 두고 싶었어요. 정부 부동산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선량한 시민들의 한 모습을 담기 위해”, “개인재산이라서 서울시가 뭘 할 수도 없는데. 왜 남의 탓으로 돌릴까?”, “아아”, “저런 글귀를 볼 때 박원순 시장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래도 죽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로 바꾼 거죠”, “인간적이네요∼”, “헐”, “죽자는 말, 함부로 할 게 아닌 것 같네요”, “신속한 태세 전환”, “평범한 서울의 인민들이 박원순 시장의 죽음에 아픈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 그리고 누군가 덧붙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수십 년 전, 소설가 김승옥은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로 서울시민의 마음을 묘사한 적이 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본 것이 있으세요?” “없어요. 나도 파리밖에는….”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2020년 여름에 서울의 강변을 지나면서 중얼거린다. “없어요. 아파트밖에는.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