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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제자리인가?[동아 시론/구정우]

입력 | 2020-07-28 03:00:00

朴시장 자살 후 2차 가해에 혼란 증폭
혁신적 미투운동에도 바뀌지 않은 현실
닫힌 패권정치, 성별 고정관념이 원인
뭉개고 덮으면 강제수사 요구 커질 것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고인을 보내는 마음은 내내 무거웠다. 시민운동과 민주행정의 산 역사가 아니었던가. 서울시 5일장을 관철한 쪽이나 반대한 50만의 국민이나 저마다의 입장이 있겠지 했다. 곧장 진실의 시간이 닥쳤다. 귀를 의심케 하는 기자회견이었다. 집무실 안의 내실로 불러 안아달라고 했고, 텔레그램으로 음란한 문자와 사진을 전송했다. 추가 보도가 이어졌다. 내실로 들어가 낮잠을 깨워야 했고, 샤워를 마치면 속옷을 봉투에 담아 시장 집으로 보내야 했다. 인사이동 요청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어렵사리 근무지를 바꾼 후에도 공무원 생활 편하게 해줄 테니 돌아오라는 ‘회유’가 이어졌다. 모든 게 혼란스럽다. ‘세상은 끔찍하다’며 입을 닫은 서지현 검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도를 넘은 2차 가해 앞에 혼란은 증폭된다. ‘피해 호소인’이라는 생경한 표현이 등장했고, 서울시, 청와대, 여당, 여성가족부, 심지어 국가인권위원회까지 이 호칭으로 의견 통일을 봤다. 공영방송 진행자들은 ‘4년 동안 도대체 뭘 하다가’ ‘숨어서 뭐하는 것이냐’며 피해자를 압박했다. 한 여검사는 박 시장과 팔짱 낀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 ‘나도 성추행했다’며 가해 대열에 합류했다. ‘속옷 심부름은 흔한 일’이라는 남성 의사의 반박도 나왔다. 간호사들이 불쾌해하지 않는데, 이게 왜 나쁘냐는 거다. 혼란은 이내 분노로 바뀐다.

2018년 미투운동은 외형상 분명 혁신적이었다.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용기 있는 폭로가 이어졌고 처벌이 뒤따랐다. 가해자는 결국 죗값을 치른다는 상식이 생겼다. 우리는 달라졌고, 남성 중심적 문화에 분명 균열이 생겼다고 믿었다. 페미니즘이 널리 퍼졌고 이 덕에 우리는 페미니즘 시장도, 또 대통령도 갖게 됐다고 자찬했다. 일부 급진 여성운동이 과격해지고 젊은 남성들은 항변했지만 미증유의 젠더 전쟁도 미화해볼 요량이었다. 미투운동이 인간답게 살 세상을 열 것이고, 성평등이 우리의 미래를 열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바뀐 게 없었다. 젠더 특보와 시민인권옹호관으로 무장한 서울시는 화력 한 번 발휘하지 못했다. 피해자가 보낸 절망의 시그널은 공중분해됐다. 위력 앞에 성폭력 매뉴얼은 종이뭉치에 불과했다. ‘페미니스트’ 시장이 서울시 행정에 ‘성인지 감수성’을 도입한다 외치고 이내 젠더 특보를 임명했을 때 이런 무기력증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예방주사’ 역할을 통해 성차별 요소를 없애겠다는 젠더 특보의 포부는 공염불이 됐다. 시스템이 맥을 못 추자 규범의 고삐는 풀리고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성희롱과 성추행, 회유와 압박이 일상화된 서울시. 그렇게 성평등과 인권은 고꾸라졌다.

왜 우리는 제자리인가. 왜 판사는 희대의 성범죄자 손정우를 미국에 보내지 않았을까. 대통령은 왜 모친상을 당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공식 직함이 담긴 조화를 보냈을까. 인륜을 저버리는 우리 사회 풍토에 경종을 울리고 싶어서? 또 궁금하다. ‘그럴 분이 아니다’라며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정치인과 국민의 심리가. 미투운동을 지지했고 성평등 대한민국을 꿈꾸던 당신은 왜 이번 사태에 침묵하고 있는지.

패권정치의 폭주를 의심해 봐야 한다. 다른 목소리를 포용하지 않는 닫힌 정치 시스템은 가상의 선악 구도에 시민을 가두고 편협한 정의론에 옭아맨다. 여당 대표가 성추행 의혹에 관해 묻는 기자에게 욕설을 내뱉고 그의 지지자들이 ‘똑바로 질문하라’라고 목청을 높일 때 기관차는 탈선했고 민주주의는 짓밟혔다. 가부장주의가 힘을 얻고 성평등은 밀려난다. 지도자의 잘못된 시그널 앞에 시스템은 멈춰서고 미래의 범죄자는 용기를 얻는다. ‘인륜’을 가장한 가부장주의의 부활은 아닌지, 정부 여당의 패권주의가 성평등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외면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일상화된 성희롱과 뿌리 깊은 성별 고정관념 탓도 크다. 한마디 말과 행동, 표정, 시선이 성희롱의 크고 작은 무기가 되어 여성의 인격을 짓밟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비서실에 아예 여직원을 배치하지 않는 풍토가 생겨나면서 펜스룰의 부활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여성다움’을 강조하고 ‘여성다운 업무’를 양산하는 한결같은 직장 풍토는 다시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되묻게 한다.

고(故) 박원순 시장 성추행 의혹을 밝히려는 노력은 사실상 난파 중이다. 정부의 의지 부족 때문이다. 인권위 조사건, 서울시 자체 조사건 시작부터 끝까지 피해자 중심주의를 옹호해야 진실을 밝힐 수 있다. 신속 대응이 열쇠인 만큼 기민히 움직여야 한다. 뭉개고 덮으면 피해자와 국민은 언제든 검경의 강제수사를 요구할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