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현충원에 안장된 ‘6·25 영웅’
‘6·25전쟁 영웅’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불린 백선엽 장군은 논란 끝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이번 현충원 장지 논란은 한국 사회의 역사, 이념 분열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15일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안장식에서 고인의 유해와 위패, 영정 사진을 든 육군 의장대가 장군 제2묘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대전=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신규진 정치부 기자
현충원 안장지 문제는 고인의 영결식 추도사에서도 거론됐다. 송영근 예비역 육군 중장은 “한미연합사령부에 근무할 때 고인의 저서가 미군 장병 필독서로 활용됐고 미군들이 ‘진정한 영웅’이라며 고인에게 인사드리는 모습을 지켜봤다”며 “정작 우리는 살아 있는 영웅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나, 회한이 컸다”고 아쉬워했다.
고인이 대전현충원에서 영면에 들어가며 장지 문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여전히 군 원로들 사이에선 “번거롭더라도 ‘6·25전쟁 영웅’이란 상징성을 고려해 서울현충원으로 이장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고인은 육군참모총장이던 6·25전쟁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로 1955년 마련된 첫 국군묘지인 서울현충원 조성 작업을 이끌었다. 전쟁으로 황량했던 동작구 동작동 일대에 소나무를 옮겨 심고 묘역 10여 곳을 사단별로 할당해 수많은 장병들을 투입한 것 모두 그의 지시에서 비롯됐다.
그래서일까. 서울현충원에 대한 고인의 애착은 남달랐다고 한다. 2013년 5월 서울현충원 내 장군 제2묘역을 둘러본 백 장군은 그곳에 안장된 이응준 초대 육군참모총장 등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의 비석들을 매만지며 추억을 곱씹었다. 당시 고인을 초청했던 김형기 전 서울현충원장은 “장군, 사병 묘역을 둘러보던 고인이 ‘전우들과 함께 여기에 묻히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고 전했다.
○ 대전현충원은 ‘최후의 선택지’였다
육군과 국가보훈처는 백 장군이 별세한 다음 날인 11일 대전현충원 내 장군 제2묘역 안장을 확정했다고 밝히며 “유족 뜻”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유족 측은 고인이 별세한 직후 대전현충원 안장 의사를 육군에 전달했다. 서울현충원이 1996년 포화 상태가 돼 “대전현충원에만 안장이 가능하다”는 정부 방침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백 장군의 장남 남혁 씨(67)도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에서 “정부 방침과 관련 절차에 따라 대전현충원에 모시게 된 것에 만족한다”며 “더 이상 장지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족까지 나서서 장지 논란을 진화했지만 백 장군을 곁에서 지켜봐 온 많은 이들은 대전현충원이 “최후의 선택지”였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애초 이명박 정부 때는 서울현충원 내 장군 묘역이 다 찬 상황인 것을 고려해 고인을 서울현충원의 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치하는 방안이 논의됐기 때문이다. 백 장군의 서울현충원 안장은 박근혜 정부 때까지 사실상 확정적인 분위기였다.
유족 관계자는 “대전현충원 등 다른 대안들이 고려되기 시작한 건 문재인 정부 들어서였다”고 말했다. 서울현충원 안장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가 나타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안장지로 6·25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 현장도 대안으로 떠올랐다.
고인도 “(대전현충원보다는) 다부동이 나을 것 같다”며 지난해 10월 경북 칠곡군 현장을 방문했다. 하지만 유족 측은 칠곡군 측으로부터 그곳마저 “안장지로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올해 5월 보훈처 직원들이 여권에서 제기된, 친일파 시신 및 유골을 이장한다는 내용의 ‘국립묘지법 개정안’(일명 ‘파묘법’) 추진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유족들을 찾아온 것도 논란이 됐다. 한 군 원로는 “사실상 암묵적으로 (서울현충원) 안장 불가 ‘시그널’을 줬다고밖에 볼 수 없다”며 “이런 분위기에서 유족들은 서울현충원에 안장해 달라는 언급 자체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서울현충원 안장은 정말 불가능했나
대전현충원엔 묘소 7739기가 비어 있다. 장군 묘역(16기), 사회공헌자 묘역(10기) 등도 넉넉한 편이다. 천안함 폭침, 제2연평해전, 연평도 포격 도발 등으로 희생된 55명의 ‘서해수호’ 용사들도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하지만 정부는 그동안 필요에 따라 묘역을 융통성 있게 운영해 왔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울현충원 내 국가원수 묘역이 다 찼음에도 산을 깎아 자리를 마련했다. 김형기 전 원장은 “엄밀히 말하면 두 전직 대통령도 모두 대전현충원으로 가야 했다”고 지적했다.
2013년 별세한 ‘월남전의 영웅’ 채명신 장군(예비역 중장)도 “전우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당시 국방부는 사병 묘역 맨 앞줄에 별도의 자리를 만들었다. 올해 6월 세상을 떠난 황규만 장군(예비역 준장)도 서울현충원 내 김수영 소위의 묘를 나눠 쓰는 방식으로 영면했다. 고인이 6·25전쟁 당시 자신의 부대를 도와주다 전사한 김 소위 곁에 묻히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장군 모두 26.4m²(약 8평) 공간이 제공되는 장군 묘역이 아니라 3.3m²(약 1평)의 장병 묘역에 안장됐다. 예외가 허용된 대신 묘소의 규모가 줄어든 것. 의지만 있다면 서울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6·25전쟁과 한국군 역사에서 백 장군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애초부터 정부의 의지가 없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국립묘지법 시행령에 따르면 서울현충원의 시설 증감은 전적으로 국방부 장관의 승인에 달렸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백 장군 빈소에서 군 원로들에게 “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이 다 찼다”면서도 “보훈처에 (원로들의) 의견을 다시 전달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정 장관이) 논의를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김판규 전 육군참모총장의 말처럼, 군 후배인 정 장관이 적극적으로 고인의 서울현충원 안장을 추진했어야 했다는 볼멘소리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 지난달 서울현충원 측은 백 장군을 이곳에 안장하면 ‘충혼당이나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분들의 유가족 등의 강한 반발이나 사회적 형평성 문제, 특혜 논란이 우려된다’고 국방부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현충원이 안장 불가 방침이 묘소가 다 차서만은 아니라는 걸 인정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 ‘역사 바로 세우기’ 드라이브와 무관치 않아
백 장군이 안장될 때까지 군 통수권자인 문 대통령은 끝내 추모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청와대에선 김유근 전 국가안보실 1차장만이 영결식에 참석했다. 그래서 “정부가 고인을 홀대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백 장군의 서울현충원 안장을 추진하지 않았던 것 역시 출범 초부터 강한 ‘역사 바로 세우기’ 드라이브를 걸어온 현 정부의 기조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 많다.
보훈처는 지난해 3월부터 ‘가짜 유공자’를 가려낸다며 독립유공자 1만5180명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이고 있다. 백 장군 안장식이 이뤄진 다음 날인 16일 대전현충원 홈페이지 내 고인의 안장자 정보 비고란에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는 내용이 게재됐다.
국방부와 보훈처는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진상규명위의 결정 사항을 기재해야 할 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지난해 3월부터 고인을 포함해 장성 12명에 대한 친일 행적을 공식화했다. 여권 일각에서 추진 중인 ‘파묘법’의 관련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백 장군은 장지 문제가 정치권이나 이념 공방으로 번지는 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백 장군은 영면에 들었지만 10년 넘게 이어진 현충원 장지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규진 정치부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