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조광한 남양주시장 ‘인문학의 힘’ 주제 대담
■ 최진석 교수
공간 재배치 통한 인문적 태도 중요정약용 도서관이 선도적 역할 해야
■ 조광한 시장
새로움 향한 ‘호기심’이 다산정신
실패 통해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야
새로움 향한 ‘호기심’이 다산정신
실패 통해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야
지방행정에도 인문학이 필요할까. 3일 경기 남양주시 정약용도서관(위쪽 사진)에서 만난 철학자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왼쪽)와 조광한 남양주시장은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남양주=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와 가까운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태어났다. 남양주시는 올해 5월 정약용도서관을 다산신도시에서 개관했다. 연면적이 1만3000m²로, 경기 북부 최대 규모이자 전국에서 6번째로 큰 공공도서관이다. 장서 수도 22만3000여 권 에 이른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도서관과 스웨덴 스톡홀름 중앙도서관을 벤치마킹해 북유럽식의 감각적인 공간 구성과 채광, 개방감을 적용한 게 특징이다.》
남양주시 제공
제공한 인물이다.
남양주가 개발 이슈에 비해 관심도가 떨어지는 역사와 인문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자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와 조광한 남양주시장이 3일 정약용도서관에서 만나 ‘인문학의 힘’에 대해 대담을 가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도서관 운영이 중단됐으나 이날 대담은 체온 측정 등 철저한 방역 절차를 거쳐 도서관 2층에서 진행됐다.
진행=이종승 부국장
조광한 남양주시장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
도시에 인문학이 왜 필요할까
―남양주시는 최근 정약용도서관을 개관하는 등 인문학을 강조하고 있다. 도시에서 인문학을 중시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인문적으로 공간을 대한다는 것은 공간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정도의 문제를 넘어선다. ‘공간이 이래야 되겠다. 공간이라는 것이 인간한테 이런 의미가 있구나. 또 우리가 공간을 이렇게 재배치해야겠구나’라고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것이 공간에 대한 인문적인 태도라고 본다.
공간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다니는 노선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대상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형태가 달라진다. 공간을 더 잘 배치해보려는 노력 그 자체가 ‘인문적’이다. 인문적이라는 말은 ‘선도적·창의적·선진적’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을 대하는 인문적 태도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 시장=최 교수님이 제시하는 인문학적 비전과 가치를 잘 음미해보면서 정체됐거나 고착돼 있는 우리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불씨를 한번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다. 도시와 인문학의 만남을 통해 시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든 장담할 수 없고 예단할 수 없으나 실패가 됐든 성공이 됐든 뭐든지 해야 한다. 실패가 있어야 반성을 해서 뭐라도 한다. 실패가 없으면 절대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최 교수=‘실패가 있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실패의 가능성이 매우 적어진다. 실패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실패가 항상 준비돼 있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다. 남양주시가 인문적인 높이, 문화적 높이를 향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약용도서관의 규모가 전국에서 6번째로 크다고 한다. 북유럽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조 시장=막연하고 조금은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북유럽 도서관들을 보면서 구체화시켰다. 인간이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에 의해서 인간이 지배를 받는다는 교수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도서관은 공부나 독서의 공간에 그치지 않고 생각의 공간이 돼야 한다. 생각의 공간이 만들어지려고 하면 그에 맞는 공간 디자인이 필요하다. 앞으로 도서관은 딱딱하고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내 집 거실처럼 편안하게 책을 읽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 정말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지만 90%만 만족하고 있다. 나머지 10%를 어떻게 채우느냐를 고민하고 있다.
최 교수=지금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한 생각의 결과를 살았다. 우리가 생각해서 살지 못했다. 우리는 지식생산국이 아니라 지식수입국이었다. 우리나라가 해야 할 혁신은 지식수입국에서 지식생산국으로 바뀌는 것이어야 한다. 혁신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고 싶으면 항상 해야 하는 것이다. 요즘 같은 변혁의 시대에는 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정약용도서관이 생긴 의미를 크게 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생각을 않던 삶에서 생각을 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생각하는 공간을 선도적으로 그리고 비중을 둬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혁신 방향에 매우 맞는 일이라고 보고 남양주가 모범이 돼 다른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정약용도서관을 건립한 남양주시에 박수를 보낸다.
―남양주에서 태어난 다산은 목민관의 리더십을 제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다산의 정신 중 무엇이 강조돼야 한다고 보나.
조 시장=정약용 선생은 염원하고자 하는 사회 변혁의 꿈이 현실에서 좌절되는 아픔을 많이 느끼셨다고 본다. 그의 핵심 키워드는 ‘호기심’이다. 성리학적 질서의 사회 속에 비성리학적 문물에 관심을 가졌다. 개인적으로 다산이 천주교 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단으로 천주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18년의 귀양생활을 해야 했다.
정약용 정신은 늘 시대의 현상에 머물지 않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려는 호기심에 있다고 본다. 천주학을 학문적 관심으로 접근해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정약용도서관을 새 도서관 이름으로 정했다.
최 교수=호기심이라는 키워드는 인류에게 있어 변혁의 출발점이다. 정약용 선생이 분명하게 제시한 것은 ‘나의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겠다(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다. 그는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라고 절규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유교를 중심 이데올로기로 삼고 200년 동안 아무런 혁신 없이 지내다가 1592년 임진왜란을 겪었다. 임진왜란 후에도 정신을 못 차렸다. 1836년 정약용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70여 년 뒤 한일병합이 됐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없이 남의 생각을 받아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는가 하는 것을 조선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정약용 선생은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호소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은 지식과 정보가 힘이 되는 사회로 가는 것이기에 지식과 정보가 숨쉬는 도서관이 과거에 비해 훨씬 중요해졌다. 다른 나라보다도 특히 우리에게 그렇다.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을 기억하자
―남양주 출신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이름을 딴 광장과 뉴미디어도서관을 만들고 있다. 정약용도서관 건립과 같은 맥락인가.
조 시장=역사적 평가가 다르겠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세 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본다. 독립전쟁, 6·25전쟁, 베트남전쟁이다. 독립전쟁을 통해 나라를 되찾았고, 6·25전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 베트남전쟁은 우리가 경제적인 도약을 할 수 있는 불씨가 됐다. 그중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독립전쟁을 치렀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우리 모두가 존경심을 갖고 있지만 실생활과는 별로 연결이 안 돼 있다. 어쩌다 한 번씩 강조될 뿐이다. 엄청난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독립운동가들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더 가슴 아프다.
모든 영광은 동생인 이회영·이시영 선생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석영 선생이 아니었으면 두 분도 (독립운동 업적을 남기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본다. 이석영 선생이 1910년 전 재산을 팔아 마련한 40만 원은 지금 가치로는 2조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이회영·이시영 선생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인정을 받고 있으나 동생들을 위해 헌신하고 전 재산을 바쳤던 이석영 선생의 희생과 아픔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공정의 정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거창하게는 아니더라도 그분의 발자취를 남양주에 남기는 것이 공정성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을 갖고 있다. 이석영 광장은 나라를 잃은 아픔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8월 29일 경술국치일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남양주가 만든 역사공간 ‘리멤버1910’은 어떤 곳인가.
조 시장=정약용 선생이 돌아가시고 70여 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그 아픔을 결코 잊어선 안 되지만 국가가 강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애국심은 저절로 우러나와야 한다.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여러 역사적 기록에 나와 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아들 딸 손자손녀 세대를 건강하게 키워낼 수 없다. 리멤버1910은 전시관이 아니라 카페처럼 꾸몄다. 와서 먹고 마시고 놀다가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리멤버1910의 또 다른 의미는 상처 그리고 다짐이다. 상처를 기억하고 기록해둬야 한다. 상처가 상처로만 끝나선 안 되고 다짐을 해야 한다. 내가 돈이 없어서 구박을 받았다고 치자. 그 상처를 기억해야 돈을 벌려고 노력하지 않겠나.
최 교수=상처라는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모든 새로운 것들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불편한 것을 해결한 것이다. 상처를 아물게 한 것이다. 호기심이 없으면 문제가 안 보인다. 호기심이 살아 있지 않으면 상처를 쉽게 잊는다. 상처를 보지 못한다. 단순히 리멤버 1910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선 상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를 느끼고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특징은 언택트·온택트·로컬택트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비대면 교육이 본격화되는 느낌이다.
조 시장=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것은 세 가지다. 하나가 비대면을 뜻하는 언택트(untact)다. 온라인을 통한 접촉인 온택트(ontact)도 주목받고 있다. 그리고 멀리 가기가 불안한 시대이니 로컬택트(local-tact)가 중요해진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내 삶의 여백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수락산 계곡에 있던 평상과 천막 등 불법시설물들을 철거한 뒤 모래사장(길이 160m)을 갖춘 시민정원 청학비치를 조성한 게 대표적이다. 하반기에는 이석영 광장, 역사체험관, 역사문화 둘레길 같은 로컬택트 공간들을 선보일 계획이다.
앞으로는 온라인 교육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돼야 한다. 온라인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노트북이다. 왜냐하면 온라인 세계라는 태평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다. 그 배가 노트북이다. 남양주시는 한 달 반 전부터 지금까지 취약계층 청소년 2300여 명에게 노트북을 지급했다. 약 20억 원의 비용이 들었다. 청소년들은 온라인의 세계를 빨리 접촉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노트북을 통해 게임을 한다, 음란물을 본다는 등의 부작용을 강조하면 도구를 뺏는 것이다.
최 교수=기술적으로 이미 준비돼 있고 인간이 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과거에 잡혀 사용하지 않거나 이동하지 않으면 전쟁이나 전염병이 돌아 그것을 강제로 적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전염병이나 전쟁이 가진 특징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 그래왔다. 저는 온라인 교육이 코로나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방향이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온라인으로만 하자는 게 아니라, 온라인을 확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의료도 기술적으로 이미 원격의료가 준비돼 있다. 과거의 문법으로 보면 원격의료가 생소하기 때문에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이번에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원격의료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새로운 것들은 안착되면 항상 비용이 덜 들고 이익이 커지는 특징이 있다. 지금 각 대학마다 건물을 만들고 하는 과정에서 돈이 많이 들고 있다. 온라인 교육으로 하면 강의실 수요가 많이 줄고 비용도 절감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가 인문적인 높이로 상승하려는 과감한 도전을 할 필요가 있다. 어찌 됐든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도록 강요할 것이다. 판이 흔들리는 이런 일이 후발주자들에게는 기회다. 이 기회를 전략적으로 잘 살리면 우리가 선도국가나 전략국가로 올라설 수 있다.
―남양주의 교통 접근성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조 시장=남양주가 서울에서 가깝지만 교통은 불편한 도시다. 남양주만의 문제라기보다 수도권의 문제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이라는 공간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 개념으로서 남양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대도시와 주변 도시 간의 상생과 보완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게 잘 안 이뤄졌다. 서울의 부족한 주택 기능만을 옮기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남양주가 서울의 보조기능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교통이다. 남양주는 서울 강남권까지 거리가 16km에 불과해 철도교통 문제만 해결되면 강남권에 편중된 중심지 기능을 일부 흡수할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철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 왕숙지구에 3기 신도시를 유치했다. 왕숙신도시 개발에 따른 교통대책으로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B노선이 확정되고 서울 지하철 노선의 남양주 연장이 추진되고 있다. GTX-B노선이 완공되면 청량리까지 17분이면 갈 수 있다. 남양주의 다핵도시(와북·진접·화도) 간 내부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땡큐버스도 도입했다.
남양주=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