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서명했다는 문건이 정치권에 한바탕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 나설 수 있게 해 준 ‘밀사(密使) 접촉’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거래가 있었다는 주장이 담긴 문서죠. 노무현 정부 시절 진행됐던 대북(對北)송금 특검은 물론 ‘진보정권’의 대북정책을 부정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공개되지 않았던 문건이라는 점에서 신뢰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사진 2000년 4월 8일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중국 베이징에서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왼쪽 사진) 27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장 후보자 청문회에서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이면합의서라며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 사진 왼쪽 문건) 동아일보 DB
청문회에서 문건을 흔들어 보인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제보자의 신원에 대해 ‘전직 고위공무원’이라는 정도로만 언급했습니다. 청와대, 국가정보원, 통일부 등에서 남북관계에 깊숙이 관여했었던 당국자가 해당 문서의 사본을 갖고 있다가 이제야 터뜨렸다는 느낌을 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 경우에도 왜 지금인지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은 없습니다.
야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해당 문건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때 까지 임명을 미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단독으로 청문보고서를 채택한 여권은 박 후보자 임명을 강행했고, 문 대통령도 청문회가 끝난 지 하루도 안 돼 28일 임명했습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식이었습니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공개한 문건이 실존하는 ‘진본(眞本)’이라면 북한에도 또 하나의 정본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문 대통령이 박 원장 임명을 강행한 탓에 이면합의 문건논란은 수면 아래로 잠복할 가능성이 높지만 북한에는 또 하나의 카드를 준 것이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현재의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비밀스러운 대북접촉에 나서야 할 수도 있는 박 국정원장이 이번 건으로 인해 북한에 약점이라도 잡힌 것이라면 협상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죠. 투명하게 집행되지 않는 대북정책은 필연적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신뢰저하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동안 남북관계의 역사가 보여준 교훈입니다.
다만 이른바 이면합의서의 내용적인 면과 관련해서는 조금 냉정하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독일을 국빈방문 중인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을 둘러보고 있다. 동아일보 DB
1차 정상회담은 우연히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2000년 3월 독일을 국빈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베를린자유대학 연설에서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북한의 도로·항만·철도·전력·통신 등 사회간접자본(SOC) 확충 △안정된 투자환경 조성 △공업구조 개혁 등을 위한 당국간 협력을 제시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한 2000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는 1면에서 “북한에 대한 농어업 생산기반 투자, 도로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 에너지 통신분야 지원 등을 포함한 ‘대북경협 활성화 계획’을 마련 중”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결국 대규모 경협은 첫 평양정상회담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은둔을 깨고 대화로 나선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먹고사는 문제 해결이라는 경제부흥에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죠.
하태원 채널A 선임기자(부장급·정치학 박사수료)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