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직후 巨與신중론 벌써 ‘없던 일’ 부동산 입법 강행처리 면죄부는 착각
정연욱 논설위원
“우리는 승리에 취했고, 과반 의석을 과신해 겸손하지 못했다. 일의 선후와 경중과 완급을 따지지 않았고 정부와 당보다는 나 자신을 내세웠다. 그 결과 우리는 17대 대선에 패했고 뒤이은 18대 총선에서 겨우 81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총선이 끝난 지도 벌써 100일이 더 지났다. 그러나 현실은 이해찬의 주문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완전한 역주행이다. 어느 정도의 과속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의 폭주일 줄은 몰랐다. 정부 부동산 대책의 역풍이 불길을 더 키우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타성을 버리지 못했다. 부동산 대책을 ‘투기 세력과의 전쟁’으로 규정했고, 부동산 약자를 위한 ‘착한 정책’으로 포장하는 데 급급했다. 부동산 정책이 아니라 부동산 정치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출범한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부동산시장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혼란스럽다. 현 정부 지지층인 젊은 세대가 등을 돌리고, 친문 성향의 맘 카페에서도 ‘부동산 정책은 실패’ ‘누구를 위한 서민 정책인지 화가 난다’는 정부 비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파장이 진영의 경계선을 허물고 있으니 여권은 초긴장 상태다. 민생경제 실패가 더 무서운 이유다.
정작 여권의 대응은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그대로다. 현 정부에서 3년 넘게 22번이나 부동산 대책을 쏟아놓고도 집값이 안 잡힌 것이 이전 정권 탓이라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난데없이 등장한 천도(遷都) 카드도 불리한 상황을 뒤집으려는 국면 전환용이라는 시빗거리가 됐다. 이러니 범여권 인사들까지 “그게 문제였다면 지난 3년간 무슨 노력을 했나. 국민 반발이 커지니까 희생양을 삼아서 돌리려는 것 아닌가”라고 비판할 정도다.
정치적으로 불리한 국면이면 침묵하고, 자신들의 과오나 실패 인정은 가급적 피하는 게 정치적 기술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상이 되면 정치 동력이 될 메시지는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조국 사태에서 문재인 정권의 공정과 정의의 가치는 직격탄을 맞았지만 문 대통령은 조국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다. 박원순의 성추행 사건이 터지면서 ‘페미니스트 정권’의 구호는 빛이 바랬지만 문 대통령은 아직까지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성추행 사건의 주무 장관인 여성가족부 장관은 박원순 사건이 ‘권력형 성범죄냐’고 묻는 야당 의원 질의에 “수사 중인 사건”이라고 끝까지 버텼다. 만약 야당에서 이런 비슷한 일이 발생했으면 여당이 어떻게 나왔을까 묻고 싶다.
여당은 국회법에 명시된 상임위 소위(小委) 구성, 축조심사, 찬반토론의 절차는 의무조항이 아니어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과거 소수야당 시절엔 이런 법안 심사는 온몸으로 막았을 것이다. 아무리 허언(虛言)이 난무하는 정치권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선은 있어야 한다. 여당은 법안 강행 처리를 ‘국민의 명령’이라고 포장하지만 다수당의 폭주는 민심 이반을 자초할 뿐이다. 자꾸 16년 전 열린우리당 기억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