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수사와 서울시 조사 넘어선 진정 조사로
권력보다 피해자 편에 서는 출범 20년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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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사회부장
“미국에서 상원의원 비서의 성희롱이 이슈가 됐다”며 의욕을 보인 건 당시 변호인단 중 한 명이었던 박 전 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최 위원장은 “탁월하면서도 헌신적”이라며 박 전 시장을 극찬했다. 최 위원장은 국가인권위원장을 맡기 전 박 전 시장의 서울시와 자주 교류했다. 2012년 10월엔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이사를, 2016년 2월엔 서울시 인권위원장을 지냈다.
최 위원장이 빈소를 다녀가고 이틀 뒤인 14일. 국가인권위 홈페이지에는 박 전 시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고소한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부르는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서울시와 여권 등에서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불러 ‘2차 가해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진 시점이었고, 특히 인권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인권위의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 다음 날 ‘피해 호소인을 피해자로 고쳐 달라’는 진정이 접수된 뒤에야 피해자로 용어를 바꿨다.
일련의 과정은 국가인권위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최 위원장뿐만 아니라 A 상임위원도 여성단체 활동가 출신이다. A 위원은 서울시의 인권위원을 지냈고, 실종 직전 박 전 시장과 통화한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 박 전 시장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처음 보고한 서울시 임순영 젠더특보 등과도 가깝다. 피해자들이 제출한 직권조사 요청서에 ‘고소 사실이 박 전 시장에게 유출된 경위’도 포함돼 있는데 남 의원과 임 특보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직권조사 결과를 A 위원 소관인 차별시정위원회가 검토할 경우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제척 얘기가 전혀 없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은 법원의 영장 기각으로 경찰 수사가 막혀 있고, 서울시의 자체 진상규명조사단은 출범조차 못 했다. 피해자 측이 고심 끝에 국가인권위를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진정을 낸 것이다. 1998년부터 국가인권위법 제정과 설립 과정에 참여하고, 국가인권위 초대 사무총장과 2기 상임위원을 지낸 최 위원장의 3년 임기는 국가인권위가 출범 20년을 맞이하는 내년 9월에 끝난다.
최 위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 때 친여권 성향이라는 공격에 “저는 성폭력 문제도 처음으로 제기하면서 굉장히 많은 사회적 비난 그리고 의심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왔고, (앞으로)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해 소신껏 하겠다”고 답했다. 이 발언으로 피해자보다 권력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았던 인권위를 정상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이번에야말로 국가인권위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길 기대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