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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에 수마까지 겹친 농민들[현장에서/김태성]

입력 | 2020-08-05 03:00:00


경기 이천시 율면 산양리에서 폭우 피해를 입은 복숭아밭. 이천=김태성 기자 kts5710@donga.com

김태성 사회부 기자

“밭을 잘 가꿔놓아서 조만간 열매가 열리는데… (폭우에) 싹 쓸려가 버렸어.”

3일 경기 이천시 율면 산양리. 마을이장 박종진 씨는 ‘쑥대밭’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토사와 쓰레기가 뒤엉켜버린 땅. 그나마 형태가 남은 작물지지대가 이곳이 포도밭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이곳엔 2일 새벽부터 약 7시간 동안 193mm의 비가 내렸다.

포도밭뿐만이 아니다. 마을 저수지도 버텨내질 못했다. 둑이 터지고 개천이 넘쳐버렸다. 다행히 이 마을에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아픔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박 이장이 애지중지 키운 복숭아나무도 물난리를 피하지 못했다. 바닥에 수북이 떨어진 복숭아는 둘째 문제다. 물에 한번 잠긴 나무는 곧 뿌리가 썩어 생명을 다한다. 박 이장은 “5년 동안 정성껏 키워 지난해 처음 수확했다. 나무를 다시 심어 열매를 맺으려면 또 5년을 고생해야 한다”고 했다.

도시처럼 주목받진 못했지만, 시골도 올해 길고 힘든 시기를 겪어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일손이 부족한 농촌의 인력난을 한층 가중시켰다. 외국인 노동자는 자취를 감췄고, 한국인도 구할 수가 없다. 역시 복숭아를 재배하는 이마리 씨(58)는 “주말이면 아르바이트 오던 학생들도 코로나19 탓에 오질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수해를 입은 집과 밭은 치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이번 비 피해는 말 그대로 수마(水魔)였다. 충남 금산에서 깻잎을 재배하는 양인호 씨(57)는 부족한 인력을 사돈에 팔촌까지 동원해서 어렵사리 꾸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뚫려버린 하늘은 잔인했다. 폭우를 헤치고 밭을 지켰지만 절반 이상 내버리게 생겼다. 양 씨는 “파종부터 다시 하려면 적어도 3개월은 또 벌이가 없어진다”며 “이젠 누가 도와준다고 해도 일당을 줄 형편이 못 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충남 아산에서 친환경 채소를 재배하는 안복규 씨도 올해 상반기를 정말 ‘깡으로’ 버텼다. 지난해 대비 매출이 5분의 1로 떨어졌지만 어떻게든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아 왔다. “이번 비로 비닐하우스 17개가 물에 잠겼다. 건질 게 있는지 나가봤지만….” 최근 학교 급식 공급망이 다시 열려 숨통이 트이나 했건만 떨리는 목소리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비는 언젠가 그친다. 초토화된 농가도 어떻게든 살아간다. 하지만 농촌은 지금 겉으로 보이는 피해가 전부가 아니다. 이제 좀 나아지려나 싶었던 기대가 무너지며 겨우겨우 버티던 발목이 꺾여 버렸다. 이제 수해 현장엔 국무총리를 비롯해 많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손잡고 위로를 전할 때 한 가지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발 딛고 일어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들은 지금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다.

김태성 사회부 기자 kts57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