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국내 피폭자 세대별 연구 나서
폐허로 남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의 오늘날의 모습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는 75년 전 먼 과거의 일이지만 이 사태를 겪은 생존자와 그 자손에게는 여전히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이들이 참여한 의학과 과학 연구 역시 이어지고 있다. 위키미디어 제공
○인류에 방사선 위험 경고한 피폭자 장기 추적연구
일본의 원폭 피해자 장기 건강연구는 미국이 처음 시작했다. 미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 원폭상해조사위원회(ABCC)를 긴급하게 구성하면서다. ABCC는 일본 원폭 투하 직후 보고된 피폭자 9만4000명과 피폭 피해를 입지 않은 일반인 2만7000명 등 총 12만 명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수명조사(LSS)’를 1950년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이 1975년 공동 설립한 방사선영향연구소(RERF)가 이어받아 현재까지 70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원자력발전 시설이나 관련 시설 건설과 운영 과정에서 필요한 방사선 분야 지식의 대부분이 이 거대한 장기 코호트(통계적으로 동일한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집단) 연구에서 나왔다. ABCC는 복잡한 피폭의 건강 영향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피해자 2만8000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피폭 당시 원자폭탄 폭발 위치로부터의 거리와 자세, 지상 또는 지하 거주 여부, 나이, 성별 등을 자세히 담고 있다. 어릴수록, 여성일수록 더 방사능에 취약하다는 사실도 이 연구로 드러났다.
피폭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2세에게 기형, 사산, 저체중 등의 영향이 없다는 연구 결과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48∼1952년 피해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 6만 명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로,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거두게 했다. 피해자 자녀 7만7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조사에서도 2세의 건강 영향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따르면 현재 LSS에 참여하는 피해자의 70%는 질환과 고령으로 이미 숨졌고 나머지 참여자 대부분도 이미 80세 이상의 고령자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대안으로 피폭자 3만 명에게서 확보한 혈액 시료를 활용한 연구에 기대를 걸고 있다. 유전체(게놈) 분석을 통해 방사선 피폭이 DNA에 남긴 직접적인 영향인 변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원폭 피해자 두 번째로 많은 한국도 75년 만에 본격 연구 시작
한국은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원폭의 피해자가 많다. 2019년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은 약 7만 명이 피폭했고 4만 명이 숨졌다. 피해자 가운데 2만3000명이 귀국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2018년 8월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생존 피해자 수는 2283명에 불과하다. 1세대의 90%는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중앙 정부 차원의 실태 파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2004년 원폭 피해자 1세대 1400여 명, 2세대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직접조사 및 우편조사로 진행한 실태조사가 거의 유일한 사례다.
2016년 5월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피해자 실태조사와 의료적 지원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18년 말부터 원자폭탄 피해자 현황 및 건강 생활 실태조사를 벌였고 지난해 4월 결과를 발표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원폭 피해자 1세대의 23%는 장애를 가졌고, 수명조사 결과와 다르게 장애를 겪는 2세대도 8.6%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도 이런 점을 파악하고 최근 원폭 피해자에 대한 코호트 구축 연구에 착수했다. 박보영 교수와 남진우 한양대 생명과학과 교수 팀이 진행하는 이번 연구는 피폭 1∼3세대 최대 2700명을 대상으로 5년간 진행되며 세대간 유전성에 초점을 맞춘다. 설문조사와 건강검진, 가계도 작성 연구를 하며 일부에 대해서는 게놈 분석도 이뤄진다. 허창호 복지부 질병정책과 행정사무관은 “피해자 및 후속 세대가 지닌 질병과 원폭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