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전 탈북해 한국에 정착했던 청년이 지난달 헤엄쳐 개성으로 월북한 사건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은 이런 일이 터지면 자신들을 향한 야릇한 눈길을 감내하며 한동안 숨을 죽이고 지낸다. 한국에는 정착에 성공한 탈북민도, 실패한 탈북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공적인 정착’이라는 잣대로만 탈북민을 보는 시선은 부족함이 있다. 이에 주성하 기자가 21세기 한반도에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간첩 혐의
지난달 14일 인천의 모 처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경찰 몇 명이 김예나 씨(가명·30)와 마주 앉았다. 김씨는 북한 보위성과 내통한 간첩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다.
전달 이미 경찰은 김씨를 불러내 휴대전화를 넘겨받은 뒤 디지털 포렌식 작업에 착수했다.
이것저것 물어보던 경찰들은 “위챗 대화 내용이 다 복구되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 8월 중순에 잡힌 다음 면담을 앞두고 김 씨는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움에 잠겼다.
그는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온 몸이었다. 그가 한국으로 탈출한 뒤 중국 정부는 그에게 입국 금지를 내렸다. 남편은 중국에, 자신은 한국에 남아 이산가족이 됐다. 이런 가운데 한국 경찰에게서 간첩 혐의로 조사까지 받게 된 것이다. 이젠 어디든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됐다.
일러스트레이션 박로사 디지털뉴스팀 인턴.
# 운명의 시작
김 씨는 2008년 18세 때 한국에 왔다. 가족이 없다보니 2년 정도 서울의 한 수녀원에서 살다가 대학에 갔다. 대학 3학년 때인 2013년 캐나다로 유학을 갔는데, 이때 캐나다로 유학을 온 중국 한족 남성을 운명의 짝으로 만났다.
둘은 2016년 결혼했고, 김 씨는 남편을 따라 중국 랴오닝(遼寧) 성 선양(瀋陽)으로 옮겨갔다. 남편은 큰 식당을 운영했고 그 집안은 최소 수백 억대의 재산을 가진 부자였다. 김 씨의 집에는 람보르기니, 벤츠 아우디 랜드로바 스포츠카 등 고급 외제차만 최소 5대가 있었다. 김 씨는 부자집 사모님이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2016년 4월 수녀원에 지낼 때 알고 지냈던 한 탈북자 출신 목회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북송되면 그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김 씨였다.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제가 도와줄게요. 남편이 공안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불쌍하잖아요. 꼭 살려낼게요.”
김 씨는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조선 청년들은 중국에 도망쳐 왔다 북송되면 감옥에 끌려가 목숨을 잃을 수 있어. 나는 한 동포라 모르는 척 할 수 없어. 당신이 좀 도와줘.”
“그래, 내가 해볼게.”
남편이 두 청년의 소재를 수소문했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북송된 뒤였다.
김 씨는 이들의 탈북을 주선한 브로커를 통해 북에 살고 있는 2명 중 한 청년의 어머니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들을 꺼내는데 쓰라고 2만 위안을 북에 보냈다.
한달쯤 지난 어느 날 밤. 김 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누나, 살려주세요. 누나 덕분에 감옥에서 나와 다시 탈북한 철민(가명)이와 영남(가명)이예요.”
김 씨는 한국의 브로커에게 연락했다. 브로커는 이들을 국경에서 선양까지 데려오려면 250만 원이 든다고 했다.
“그 돈 제가 드릴게요.”
김 씨는 2명 몫으로 500만 원을 보냈다. 브로커가 움직여 철민과 영남은 선양에 왔다. 이곳에서 감옥 생활로 약해진 몸을 추스른 뒤 이들은 한국으로 떠났다. 3국까지 가는 비용으로 김씨는 다시 340만 원을 브로커에게 주었다.
김 씨의 도움으로 한국에 온 철민이와 영남이는 현재 경기 김포와 의정부에서 살고 있다.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중국 랴오닝성 선양까지 람보르기니로 탈북자를 탈출시킨 주인공의 동선. 그래픽=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 구출의 근거지
이 사건 이후 탈북민의 처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김 씨가 탈북 브로커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후부터 도와달라는 요구가 끝이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만사를 제치고 도왔다. 탈북하면 국경에서 내륙 도시로 들어오는 길이 제일 위험하다. 곳곳에 공안 초소가 위치해 차들을 단속했다.
김 씨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람보르기니를 끌고 양강도 혜산 맞은편인 지린(吉林) 성 창바이(長白)에 나가 탈북민들을 태우고 선양으로 왔다. 공안은 람보르기니는 감히 단속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창바이에서 선양까지 직접 탈북민을 데려온 것만 해도 3년 반 동안 20여 차례. 그의 식당에 숨었다 한국으로 떠난 탈북민은 300여명에 이른다. 그의 집과 식당 숙소는 언제부터인가 중국 내 탈북 루트의 중간 경유지가 됐다.
중국 감옥에 갇힌 탈북민도 남편을 움직여 7명이나 꺼내주었고, 억류돼 강제로 알몸 화상채팅을 당하는 탈북 여인도 구출한 적도 있었다.
김 씨는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모아두었던 거액의 돈을 탈북민을 구출하는데 써버렸다. 돈이 모자라면 남편에게서 사정해 더 받아냈다. 남편이 부자이고, 김 씨 역시 큰 식당을 운영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탈북민 구출은 큰 위험을 동반한 일이기도 하다.
중국 공안에 체포되는 탈북자들. 동아일보DB.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 공안에 끌려가다
지난해 5월 중국 공안 7명이 갑자기 들이닥쳐 식당에서 일하던 김 씨에게 다짜고짜 족쇄를 채워 끌고 갔다.
“명호(가명)를 아나. 왜 도와줬나”라는 심문이 시작됐다.
얼마 전 한국으로 보냈던 명호가 일행 6명과 함께 3국으로 가다 공안에 체포된 것이다. 뒤늦게 뛰어온 남편 덕분에 다행히 김 씨는 무사히 풀려났다.
“다시 한번 걸리면 더 봐주기 어려우니 이젠 손을 떼시오.”
자리를 나오기 전 아는 공안이 경고했다.
명호 일행은 중국 내 탈북 브로커들 중에서 악명이 자자한 강은아란 여자에게 걸려든 먹잇감이었다.
강은아는 중국 옌벤(延邊)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보위부 스파이다. 한국에 온 적이 없는 북에서 온 여성인데, 브로커로 위장해 은신하며 거미처럼 먹이를 기다린다. 걸려든 탈북민이 한국에 돈을 대줄 가족이 있으면 일단 한국에 보낸다고 돈을 받는다.
돈을 받으면 내륙으로 이동하는 차에 태우지만, 이후 매수한 공안을 움직여 도중에 체포한 뒤 북송하게 만든다. 이 작업이 끝나면 다시 한국 가족에게 연락해 이들을 꺼낼 수 있다며 또 돈을 요구한다. 강은아는 이렇게 두 번 돈을 받아내고, 보위부 일도 돕는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옌벤에서 이런 짓을 계속하는 중이다.
명호는 강은아가 지난해 선양까지 직접 데려와 김씨에게 넘겨준 탈북민이다. 강은아의 정체를 몰랐던 김 씨는 명호를 도와달라는 브로커의 부탁에 선뜻 12만 위안(약 2000만 원)을 강은아에게 선불로 주었다. 선양에서 명호를 넘겨받을 때 덧니가 유독 눈에 띄는 강은아의 얼굴을 김 씨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가 숨겨주었던 명호는 다른 도시로 이동하다 체포됐고 일행과 함께 북송됐다. 모든 게 강은아의 작전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김 씨는 많은 돈을 뇌물로 보내 일행들을 꺼냈고, 그들을 중국까지 다시 빼왔다. 다행히 명호는 한국에 무사히 왔다.
잡혀가는 탈북자. 동아일보DB.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 한국으로 탈출
명호 사건으로 공안의 경고를 받은 뒤에도 김 씨는 탈북민 구출을 계속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끝내 큰 사건이 터졌다.
김 씨가 숙소에서 보호해 주고 보냈던 9명이 3국으로 가다가 체포된 것이다. 탈북 브로커들의 이권다툼이 원인이었다. 두 브로커가 각각 6명과 3명 그룹을 움직였는데, 이동 도중 브로커끼리 서로 상대가 자기 사람을 빼간다고 다툼이 벌어졌다. 브로커에게 탈북민은 돈이다. 분노한 이들은 서로를 공안에 신고했고, 이동하던 9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공안에 끌려간 9명은 김 씨의 집에 숨어있었다고 자백했다. 그날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김 씨는 집에 있던 외제차 중 탈북민 9명 이송에 사용했던 아우디 스포츠카와 랜드로바, 혼다 밴을 공안이 정확히 압수해 가는 장면을 보게 됐다. 아는 공안이 전화가 왔다.
“이번에 잡히면 인신매매로 체포돼 5~7년 형을 받게 된다. 빨리 한국으로 도망가라.”
김 씨는 옷과 돈도 챙기지 못한 채 남편과 작별을 나누지 못하고 황급히 공항으로 나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는 중국 입국이 금지됐다.
이렇게 돌아온 한국에서 누군가 또 김 씨를 북한 보위성 요원과 내통한다고 신고했다. 북송된 탈북민을 꺼내기 위해 뇌물을 주며 연락했던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김 씨는 경찰의 조사를 받는 몸이 됐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는 주성하 기자.
# 흙탕에 핀 연꽃
김 씨가 탈북민을 도왔던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탈북민 한 명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지불하는 비용은 평균 1500만~2000만 원 정도였다.
브로커들은 이 돈을 먼저 온 탈북민 가족에게 받거나 교회 또는 미국의 인권단체 등에서 받는다. 이쪽저쪽에 구출대상자라고 사진을 보내 중복으로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 씨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온 탈북민만 300명이 넘는다. 이들을 한국에 무사히 대가로 여러 브로커들이 최소 45억~60억 원을 챙겼을 것으로 보인다.
이중 김 씨의 기여분이 어느 정도인지는 값을 매기기가 쉽지 않다. 그는 가장 위험한 구간인 창바이-선양 구간을 직접 외제차를 몰아 탈북민을 구해오고, 선양에 숨겨주었다. 김 씨 덕분에 브로커들은 막대한 돈을 써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던 위험 구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 써야 했을 돈은 고스란히 브로커의 이윤으로 남았다.
김 씨는 탈북민을 돕는 대가로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2억 원 넘는 돈을 썼고, 온갖 위험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 브로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런데 내 눈 앞에는 당장 위험한 고향 사람들이 있었고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한 일은 후회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일로 간첩으로 잡혀가진 않을런지….”
7월 어느 날 기자와 마주앉은 김 씨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올해 30세. 한창 인생을 즐겨야 할 20대 젊은 나이에 중국에서 온갖 위험을 뚫고 담차게 탈북민을 돕던 그는 한국에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사를 쓰는 것뿐이에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안돼요. 남편과 시댁은 아직 제가 탈북민인 줄 몰라요.”
기자는 18년 동안 북한을 취재해 왔다. 탈북 브로커의 세계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협박과 고발, 사기 등이 어우러진 아수라의 진흙탕임도 잘 안다. 그런데 그 흙탕물에도 한 떨기 연꽃이 피어있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