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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째 ‘시가 9억이하’ 묶여… 수도권 노년층엔 갈수록 그림의 떡

입력 | 2020-08-08 03:00:00

[위클리 리포트]집값 현실 반영 못하는 주택연금 가입 기준




대전 서구에 살고 있는 안모 씨(62·여)는 살고 있는 아파트 값이 몇 년 새 크게 올라 노후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7년 전 남편이 공기업에서 퇴직하면서 월급은 끊겼다. 남편 퇴직금은 자녀 2명이 결혼하는 사이 바닥을 드러냈다. 믿을 건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와 남편이 회사를 다니며 납부한 개인연금과 국민연금. 연금으로 한 달에 130만 원 정도를 받는데 공과금과 식비 등을 빼고 나면 빠듯한 살림이다.

집을 빼고 금융자산이 거의 없는 ‘하우스 푸어’인 안 씨가 기댈 마지막 카드는 주택연금이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다달이 생활 자금을 연금식으로 받겠다는 계산을 했는데 최근 집값이 급등하면서 이 계획마저 틀어졌다. 2016년 3억 원대 중반이었던 아파트 값이 주택연금 가입 상한(주택가액 9억 원)을 넘어 10억 원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안 씨는 “이제는 살고 있는 집을 줄여 생활자금을 마련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최근 부동산 광풍으로 개인연금, 국민연금에 더해 주택연금으로 ‘연금 3층탑’을 쌓아 노후를 보내려던 은퇴자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집 한 채 있는 노년들의 희망인 주택연금은 지난 5년간 신규 가입자가 매년 1만 명 넘게 늘었다. 그런데 서울 아파트 중위 값이 주택연금 가입 상한선인 9억 원을 넘길 정도로 집값 급등세가 이어지자 상한선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 집값 급등한 수도권은 가입자 비중 하향세, 지방은 꾸준한 인기

주택연금은 주택을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담보로 맡기고 평생 또는 일정기간 연금식으로 매달 생활자금을 받는 장기주택저당대출이다. 집만 있고 수중에 돈은 부족한 만 55세 이상 은퇴자와 고령자들에겐 주거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동시에 월 소득도 챙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7일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주택연금 누적 가입자 수는 7만 명을 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올해 1분기(1∼3월) 가입자 증가세가 주춤했지만 2분기 2737명이 새로 가입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2660명) 대비 2.9% 늘었다.

최근 집값 움직임에 따라 주택연금 가입 추세도 달라지고 있다. 집값이 폭등한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의 주택연금 가입자 비중은 줄어드는 반면에 지방 가입자들은 꾸준한 편이다. 신규 주택연금 가입자 중 수도권 가입자 비중은 2016년 67.8%에서 올해 6월 말 현재 61.3%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지방 가입자 비중은 32.2%에서 38.7%로 올랐다.

수도권 집주인들 사이에서 집값이 오르자 주택연금 가입을 미루거나 아예 포기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집값 상승률이 수도권보다 낮은 지방에서는 집을 담보로 노후 생활 자금을 마련하려는 수요가 여전한 편이다. 주택금융공사 관계자는 “통상 집값이 오를 때는 연금액을 더 받기 위해 가입을 미루려는 경향이 있다”며 “현재는 집값이 너무 올라 가입을 하고 싶어도 가입하지 못하는 수도권 집주인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 집값 뛰자 주택연금 가입 해지하는 집주인도

한국에는 집 빼면 자산이 별로 없는 ‘하우스 푸어’ 노년들이 미국이나 일본 등에 비해 많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60세 이상 가구 전체 자산의 81.2%는 현금 등 금융자산이 아닌 비금융성 자산이다. 살고 있는 집이 보유 자산의 43.5%를 차지한다. 김동엽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은 “주택연금 평균 가입 연령이 72세인데, 1955년 이후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가 70대가 되는 2025년부터 주택연금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집 한 채로 노후 자금을 마련하는 ‘하우스 푸어’들은 최근 집값 변화에 울고 웃는다.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모 씨(72)는 2018년 1월 시세가 약 6억 원일 때 종신지급 방식의 주택연금에 가입했다. 다달이 150여만 원의 주택연금을 받고 재산세 일부에 대한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끌렸다. 집값이 오르자 이 씨는 주택연금을 해지했다. 집값이 더 뛰면 연금 수령액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하지만 재가입 시점을 놓치는 바람에 아파트 시가가 9억 원을 넘어 이제는 재가입이 불가능하다.

김모 씨(43)는 집 한 채 외에는 마땅한 노후 자산이 없는 ‘하우스 푸어’ 장모님 걱정을 하다가 주택연금을 알게 됐다. 하지만 9억 원을 넘는 집값이 문제였다. 금융당국이 주택가격 상한을 ‘시가 9억 원’에서 ‘공시가격 9억 원’으로 높여준다고 발표하면서 이제나저제나 법이 개정되길 기다렸다. 공시가격은 시가보다 낮다. 김 씨는 “주택연금 가입이 어려우면 좀 싼 집으로 이사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노인들은 정든 동네, 살던 집을 떠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 ‘공시가격 9억 원’으로 기준 바뀌면 가입 대상 12만2000명 늘어

집값 급등 이후 김 씨처럼 12년째 제자리인 주택연금 가입 상한선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KB부동산 시세에 따르면 서울 시내 아파트 중위 값은 지난달 9억2787만 원으로 올랐다. 소득세법상 고가 주택 기준금액은 2008년 시가 6억 원에서 시가 9억 원으로 조정된 후 12년째 멈춰 있는 사이 서울 아파트의 중위가격은 2008년 4억8044만 원에서 갑절 가까이로 오른 것이다.

문제는 ‘9억 원 초과 주택은 고가 주택’, ‘9억 원 주택 소유자=부동산 부자’라는 심리적 저항선을 넘어서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11월 주택연금 가입 상한을 시가 9억 원에서 공시가격 9억 원으로 완화하고 주거용 오피스텔까지 담보로 받아주는 내용의 한국주택금융공사법 개정안을 추진했지만 20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주택연금 가입 연령을 현행 60세에서 55세로 낮추는 내용만 추가됐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집값이 계속 오르고 있기 때문에 ‘고가주택=9억 원’이라는 틀은 곧 허물어질 것”이라며 “주택 중위 값을 적용한다거나 지역별로 가입 조건을 달리 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1대 국회에서 주택연금 가입 상한을 시가가 아닌 공시가격 9억 원으로 바꾸는 주택금융공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면서 주택연금 예비 가입자들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주택금융공사 관계자는 “주택연금 가입 주택 가격 기준을 시가에서 공시가격 9억 원으로 올리면 가입 대상이 약 12만2000명 늘어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가입 기준 상한선 조정보다 시장 변화를 유연하게 반영할 수 있는 근본적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조덕호 대구대 교수는 “주택연금 가입 상한선을 두지 말고 집값의 70%를 주택 가격으로 잡고 연금을 계산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신나리 journari@donga.com·김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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