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총선 꺼낸 총리-대통령 향해 성난 시위대 “사퇴 안하면 교수형” 경찰 1명 숨지고 200여명 부상
시위대 진압하는 레바논 경찰 8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현 정권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고 있다. 이날 베이루트의 순교자광장 등에서는 시민 1만여 명이 나흘 전 베이루트 항구의 폭발 사고가 정권의 무능에서 비롯된 인재라고 규탄했다. 이 사고로 현재까지 약 160명이 숨지고 약 6000명이 부상을 입었다. 베이루트=AP 뉴시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8일 베이루트 중심가 순교자 광장에는 최소 1만 명의 시민이 몰려 정권 퇴진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을 베이루트 항구 창고 폭발로 숨진 158명을 추모하는 ‘복수의 토요일’로 명명했고 ‘정부가 살인자’ ‘정권 몰락을 원한다’ 같은 팻말을 들고 행진했다. 일부 시위대가 의회 진입을 시도하자 경찰이 최루탄과 고무총을 쏘고 시민들이 돌로 맞서면서 차가 뒤집히고 화염이 난무하는 등 도심 전체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군 장교가 이끄는 일부 시위대는 외교부 건물을 점거하고 미셸 아운 대통령 사진을 불태웠다. 24세 청년 장 헬로 씨는 가디언에 “대통령을 죽이고 싶다. (대형 사고가 났는데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규탄했다. 현 정부가 위험성을 알면서도 6년간 인화물질인 질산암모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폭발 사고가 났다는 의미다.
사실상 베이루트항을 관할하는 헤즈볼라 역시 폭발 사고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2018년 총선 때는 친헤즈볼라 성향 정당들이 전체 128석의 과반을 차지했다. 하지만 민심 이반이 심각해 총선이 다시 치러지면 과반 확보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종파 정치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토착 기독교 마론파 등 18개 종파가 있는 다종교 국가 레바논에서는 1989년부터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출신이 맡는 식으로 권력을 분할해 왔다. 종교 화합이란 취지와 달리 분열과 갈등이 더 심해지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레바논 정부는 2015년에도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쓰레기 파동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지난해에는 젊은층이 즐겨 사용하는 미 소셜미디어 ‘와츠앱’에 세금을 물리려다 거센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다. 수십 년간 이어진 부정부패와 경제난도 심각하다. 최근 10개월간 레바논 파운드화 가치는 미 달러화 대비 80% 이상 떨어졌고 실업률도 40%를 넘는다. 유엔은 “레바논의 많은 가정에 수도나 전기가 공급되지 않고 있다. 식량 부족도 심각하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의료 공백도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9일 과거 레바논을 식민통치했던 프랑스는 물론이고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유럽연합(EU) 수뇌부 등이 화상회의를 열고 지원을 논의하기로 했다.
현지 언론은 횡령 혐의 등으로 일본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지난해 말 레바논으로 탈출했던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자동차그룹 회장의 베이루트 자택도 이번 폭발로 피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다만 곤 전 회장과 가족들은 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