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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표가 빗방울처럼… 건반으로 그린 여름서정

입력 | 2020-08-10 03:00:00

‘재즈 피아니스트’ 고희안의 열정




최근 한국 재즈 밴드로서는 최초로 일본 클럽 실황음반(‘Live at Jazz First’)을 낸 고희안 트리오. 왼쪽부터 정용도(베이스), 고희안(피아노), 한웅원(드럼). 고희안은 “미리 준비하지 않은 대화처럼, 재즈의 언어로 꾸밈없이 그 순간을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희안 제공

《2019년 6월 30일. 재즈 피아니스트 고희안(44)은 그날을 스냅사진처럼 기억한다. 일본 규슈 지역에 폭우가 내렸다. 고희안과 동료들은 지인의 차를 타고 후쿠오카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야쓰시로시(市)의 클럽 ‘재즈 퍼스트’. 호우로 고속도로가 통제됐다. 꽉 막힌 국도와 시골길을 돌고 돌아 평소라면 1시간 반이면 될 거리를 6시간 걸려 도착했다.》

9일 만난 고희안은 “라멘 한 그릇을 급히 먹고 녹초 상태로 무대에 올랐다”고 돌아봤다. 그날의 분위기는 ‘고희안 트리오’의 신작 음반 ‘Live at Jazz First’에 고스란히 담겼다. 1975년 1월 24일, 고통에 신음하며 빚은 미국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의 실황 명반 ‘The K¨oln Concert’가 떠오르는 일화다. 마침 고희안이 가장 존경하는 연주자도 재럿이다.

흠뻑 젖은 여름 규슈의 서정을, 고희안은 그날 붓 대신 건반으로 그려냈다. ‘…Jazz First’의 다섯 번째 곡 ‘In the Middle of Raindrop’ 즉흥연주에 음표를 물방울처럼 쏟아냈다.

“비 탓에 다른 길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날 그 연주가 나왔을 거예요. 이래서 제가 재즈를 못 끊나 봐요. 순간의 감성을 고스란히 보여주잖아요.”

고희안 트리오는 1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Jazz First’의 전곡(10곡)을 순서대로 연주한다(02-399-1000).

고희안은 군악대 시절 재즈에 빠졌다. 고려대 이공대를 자퇴하고 미국 버클리음대로 유학했다. 한인 동기들과 밴드 ‘프렐류드’를 결성해 2005년 데뷔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앨범을 15년간 17장이나 냈다.

지치지 않는 그의 속도는 음악계가 멈추다시피 한 올 하반기를 역행한다. 세 장의 음반, 세 번의 공연, 한 권의 책을 7∼10월 벼락처럼 쏟아낸다. 이르면 이달 말, 재즈 피아노 교재 ‘체르니 30번을 넘어 재즈피아노’를 낸다. 9월엔 색소포니스트 신현필과 듀오 앨범 ‘디어 슈베르트’를 발표한다, 10월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출연, 첼리스트 홍승아와의 듀오 공연, 신현필과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담은 LP 음반 ‘아이슬란드’ 발표가 줄줄이 잡혀 있다.

한국 재즈계에서는 몇몇 보컬리스트에게나 국한됐던 일본 내 활동의 길을 연 것도 고희안의 불같은 열정과 집념이다.

“2010년부터 지하철에서 일본어를 독학했어요. 세계 재즈시장의 절반을 점하는 이웃 나라에 언젠가 발을 딛고 싶었거든요.”

우연히 고희안 트리오의 음악을 듣고 반한 일본인 ‘카를로스 상’(예명)의 전폭적 지원 덕에 2017년부터 규슈 지역의 클럽을 돌며 공연했다. 매년 객석이 차고 팬이 늘었다.

고희안 트리오는 올해 6월 야마하의 원격 연주 피아노 ‘디스클라비어’의 광고모델도 됐다. 고희안 제공

고희안은 “엊그제는 후쿠오카에서 팬들이 모여 제가 우편으로 보낸 ‘…Jazz First’를 함께 듣는 음반감상회도 열었다고 한다. 늦깎이 아이돌이라도 된 기분이다. 한일관계가 정상화돼 문화 교류가 다시 활발해지는 날 역시 꿈꾼다”며 웃었다.

지난해 말부터는 스페인어 공부도 시작했다. 페루 현지인과 매주 화상통화를 하며 회화를 익힌다.

“꽤 오래 음악을 했지만 요즘처럼 밀어붙인 적은 없어요. 코로나19 이후 변화된 세계에서 ‘오늘 못 하면 내일 하지’라는 생각은 쓸모없겠더라고요.”

스페인어 공부는 스페인어권 남미와 유럽 진출을 위한 멀리 본 포석이다.

“변화하는 사회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줘요. 저 역시 음악을 왜 시작했는지, 그 초심으로 돌아가는 요즘입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