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그 시절 일기장엔 이런 일화가 적혀 있었다. ‘오늘 수업에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내 직업을 섹스 칼럼니스트라고 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냥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 거짓말을 해봤다. 나는 내가 지겹다. 어느덧 서른인데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살 것 같아서 지겹다. 하지만 오늘 인생에서 새로운 일을 해 기쁘다. 아마 같은 공간에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그런 거짓말은 안 했을 거다. 나는 연기학원 안 다녀도 이런 연기 할 수 있다고 놀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다.’
지금 읽어 보면 이상한 애들이네 싶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지겨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그러다 최근 우연한 기회로 연기 수업을 듣게 됐다.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청년 커뮤니티 지원금’을 받아 시작된 스탠딩 코미디 모임이다. 친구의 대학 시절 연극동아리 선배가 유명한 배우여서 그분의 연습실로 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내 옆에 와서 앉아’라는 말만 해서 일곱 번 안에 상대를 내 옆에 앉히는 미션이었다. 다른 말은 해선 안 되고 오직 그 말만 해서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타깃이 된 사람은 불쌍해서, 미안해서 가서 앉아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정말 마음이 동하면 가라고.
첫 번째 친구가 해맑게, 애타게, 일곱 번이나 외쳤지만 나는 가지 앉았다. 두 번째 친구는 민소매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쇄골을 가리키며 ‘내 옆에 와서 앉아∼’라고 했다. 그 순간 마음이 움찔했는데 두 번째엔 옆으로 눕더니 ‘내 옆에 앉아’라고 했다. 그 순간 달려가서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상대는 내가 가지 않은 친구였다. 막상 그 친구를 내 옆에 앉게 하려니 너무 어렵게 느껴졌고, 아까 내가 가지 않았던 게 미안해 울고 싶어졌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했다. “만약 상대가 와서 앉지 않는다 해도, 별일 아니에요. 여러분도 갑자기 시간이 나서 누구에게 전화해 밥 먹자 할 때 있잖아요. 그런데 상대가 이미 먹었대. ‘아, 그래? 그럼 알겠어∼’ 하고 전화 끊겠죠? 그런 거예요.”
순간 나를 스쳐갔던 거절들이 떠올랐다. 하필, 지금 이 순간에? 선생님 말처럼 정말 거기에 의미부여 안 해도 되는 거겠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내 옆에 와서 앉아’라고. 이제 기회는 여섯 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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